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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28. 2019

사랑을 모르면

주역, 뇌지예

장구(長久)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자(老子, 도덕경)』에 나오는 말인데 백낙천(백거이, 772~846)에 의해서 한 번 뒤집어진 이후로는 본뜻보다는 ‘뒤집어진 뜻’으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우리에게는 유덕화, 오천련이 열연한 영화 <천장지구>(진목승, 1990)이후로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그 내력을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은 영원무궁하다. 하늘과 땅이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장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자신을 남보다 뒤로 돌림으로써 남보다 앞에 나설 수 있게 되고, 자신을 잊고 남을 위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 이는 무사(無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이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耶. 故能成其私.)」

이 말은 《노자(老子)》 제7장에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천장지구’는 성인을 비유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하늘과 땅만큼 오래가고 영원히 변치 않는 애정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은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서 유래한다.     

헤어질 무렵 은근히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으니(臨別殷勤重寄詞)

그 말에는 둘이서만 아는 맹서가 들어 있었지(詞中有誓兩心知)

칠월 칠석 장생전(長生殿)에서(七月七日長生殿)

깊은 밤 남몰래 속삭인 말(夜半無人和語時)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在天願作比翼鳥)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자(在地願爲連理枝)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天長地久有時盡)

이 한(恨)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此恨綿綿無絶期)     

〈장한가〉는 120구, 840자로 이루어진 당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전단은 총 74구로, 현종이 양귀비를 만나 지극한 사랑을 나누다가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양귀비가 죽은 후 밤낮으로 그녀를 그리워하며 창자가 끊기듯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그렸다. 후단 46구는 현종이 양귀비를 못 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 도사가 선계로 가 선녀가 되어 있는 양귀비를 만나 그녀에게 들은, 현종을 그리워하는 양귀비의 마음과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의 맹약으로 되어 있다. 위에 예로 든 부분은 선녀가 된 양귀비가 도사에게 이야기해 준, 천보(天寶) 10년(751) 칠월칠석에 현종과 양귀비가 화청궁(華淸宮)에 거동하여 노닐며 장생전에서 나눈 사랑의 맹약 부분이다.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라는 구절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애정을 비유하는 말인 ‘천장지구’가 유래했다. 〈장한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었으며, 시가와 소설과 희곡으로 윤색되는 등, 중국 문학에 많은 제재를 제공했다. (출처 : 다음 고사성어 대사전)   

  

노자는 ‘무사(無私)’하여 ‘천장지구’의 경지에 드는 것을 바람직한 삶의 태도로 강조하지만 백낙천은 “그렇게 심심하게, 도나 닦으며, 마르고 닳도록 오래 살면 뭐하나?”라고 코웃음을 칩니다. “끝이 없다고? 인간사에서 끝없는 것이 어디 있겠나? 있다면 오직 변치 않는 사랑뿐이지?”라고 ‘인간’을 앞세웁니다. 행여 날마다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진다 해도 인간은 인간을 사랑해야지 그것 이외를 생각해서는 ‘말짱 도루묵’이라고 시인은 일갈합니다. 성인이 되는 일도 중하지만 그것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더 중하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주역을 읽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주역은 모든 점복서들이 그러하듯이 ‘적게 말하고 많은 것을 일깨우는’ 화법을 씁니다. ‘시는 애매해야 한다’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습니다. 효용론적 측면에서 보면 타당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마다 취할 수 있는 의미와 감동이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를 지을 때 꼭 그런 효과를 노리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시인 자신에게도 애매한 정서가 시작의 동인이 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다만 독자 입장에서는 좀 다릅니다. 시를 읽든 점복서를 읽든 내게 필요한 것 하나만 절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면 대만족입니다. 어차피 그런 것들은 ‘적게 말하고 많이 들려주는 말’이니까 이것저것, 이놈 저놈의 말에 혹해서 굳이 동분서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우왕좌왕 하는 일 없이 바삐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새 동창은 밝고 노고지리는 우짖어 책을 덮어야 할 때가 옵니다. 인생만사 주경야독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평생 책만 들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논밭도 갈아야 하니까요. 그러니 내 맥락(콘텍스트) 안에 책(텍스트)을 넣고 집중해서 ‘한 소식’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책 읽는 보람이 생깁니다.  

   

육오는 바로 고질병을 얻었으나 오래도록 죽지 아니하도다. (六五 貞疾 恒不死) - 사효(四爻-양효)는 강하게 동함으로 예괘의 주가 된다. 전권을 쥐고 마음대로 하니 오효가 타고 부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감히 사효와 권세를 다투지 아니하고, 가운데에 거하고 존위에 처해서 아직 망하지는 않은 상태이다. 이 때문에 (九四의 침해를 받아) 바로 고질병이 있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는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149쪽]     


주역 열여섯 번째 ‘뇌지예(雷地豫)’, 예괘에서는 육오 효사(爻辭)가 심금을 울립니다. 육효 중에 구사 하나만 양효입니다. 그 위의 육오가 ‘고질병을 얻었으나 오래도록 죽지 아니’한다(貞疾 恒不死)는 말이 심금을 울립니다. 어제도 위장에 탈이 나서 하루 종일 막혀서 지냈습니다. 금년 들어 두 번째입니다. 이번에는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비상약을 털어놓고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하루 동안 꼬박 속을 비울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오히려 정신이 상쾌합니다. 몸이 정신을 인도함이 그와 같아서 매번 고마움을 느낍니다. 언젠가 소귀(少鬼) 이야기를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소귀보다 더한 자가 악귀(惡鬼)겠지요. 악귀 정도는 되어야 구사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제게도 어른이 된 뒤 줄곧 악귀가 하나 따라다닙니다. 때로는 식탐(食貪)이 때로는 물욕(物慾)이 때로는 감투욕이 때로는 악연(惡緣)이 구사가(악귀가) 되어 저를 괴롭힙니다. 어제 일을 상고하니 식탐과 악연이 합작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제게 모종의 경고를 보낸 듯합니다. 아직도 자기를 비워내고 타인을 사랑함이 많이 부족함을 가르쳐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음식을 탐하는 것과 남을 원망하는 것이 둘이 아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결국 그것들은 하나입니다. 막히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것을 알겠습니다. 알고 나니 그것들이 육오의 ‘가운데 거함’을 돕습니다. 은인자중을 독려합니다. 언젠가 미꾸라지 사는 곳에 메기 한 마리를 풀어두면 미꾸라지들이 건강하게 자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치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동분서주하는 메기 덕분에 시골 논의 미꾸라지 신세긴 하지만 여태 죽지 않고 오래 버티는 모양입니다. 고질병을 얻어 오래도록 죽지 아니함을 감사히 여깁니다. 뇌지예! 정질항불사!!

<2015. 3. 28.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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