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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28. 2019

황금풍뎅이의 기적

첫사랑에 대한 오마쥬

황금풍뎅이의 기적과 첫사랑     


왜 첫사랑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최근에 본 몇 편의 영화들이 모두 첫사랑에 대한 오마쥬를 담고 있어서입니다. 첫사랑은 언제나 속절없고 아련한 것입니다. 이른바 불패의 환상입니다. 그래서 언제든 소환해 낼 수 있는 주젠데 그게 왜 죄(?)가 되느냐고 물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첫사랑만한 예술적 소재가 없는데 예술이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나 정도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는 있어도 굳이 ‘빈도’나 ‘때’를 두고 트집을 잡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과민반응이라는 것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런 유보 조항을 두고서라도, 그래도 저는 묻고 싶습니다. 왜 지금에 와서 ‘첫사랑’이 그렇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한꺼번에 쏟아지느냐는 겁니다. 혹시 그 배후에 우리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어떤 ‘깊고 푸른, 의식하지 못하는 공감대’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그런 공감대의 신호탄이나 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지금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융심리학에서 말하는 ‘황금풍뎅이’를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융 심리학에만 있는 개념 중에 동시성(synchronicity)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을 하나의 공통된 원리로 환원시킬 수 있는 정신과 정신물리적인 사건들에서 보이는 시간과 의미에 부합하는 병행’이라는 뜻이라는 데, ‘공부의 귀신’이 아닌, 우리 같은 속인으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개념입니다. 대학원을 다닐 때, 『콤플렉스, 원형, 상징』(욜란 야코비)이라는 책을 번역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자무식의 상태에서 지도교수님의 엄명을 받고 전전긍긍, 오역 일색으로 몇 달에 걸쳐 겨우 마쳤습니다. 그 책 안에서 그 말뜻을 처음 접했는데, 본격적인 심리학 도서를 처음 접했던 저로서는, 당연히 그때 그 말뜻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말이 아닌 것들은 제 머리 속으로 순순히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막연히 인과율을 뛰어넘는 어떤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다행히 그 책에서는 상징(symbol)을 설명하는 가운데 잠깐 출몰하고 마는 것이어서 그렇게 큰 고민거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황금 풍뎅이’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그 대목을 보니 개념의 모호성이 좀 걷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 칼 융에게 한 여자 환자가 있었다. 칼 융과 그녀는 서로 무지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접근이 어려웠다. 이런 환자들이 종종 있다. 이유인즉, 그녀가 모든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데 그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기하학적으로 한 치의 나무랄 데 없는 현실 개념을 동반한 날카로운 데카르트적 합리주의라는 것이다(이 문장은 칼 융이 쓴 그대로를 인용한 것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적확한 설명이다. 이제 여러분도 무슨 말인지 짐작을 할 것이다). 그녀의 합리주의를 인간주의적 이성으로 약화시켜 보려 했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그래서 융은 그녀가 자신을 가둔 지식의 크리스털 성을 깨부수고 나올 수 있는 어떤 것, 즉 예기치 못한 비이성적인 것이 일어나기만을 목매고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달변에 귀 기울이며 창을 등지고 앉아있던 칼 융, 그녀는 전날 밤 매우 인상적이었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꿈속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황금풍뎅이를 선물했다”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융은 등진 창문에서 '톡톡'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니 꽤 큼직한 곤충한마리가 들어오려고 노크 중이었다. 창문을 열어주자 날아 들어온 그 곤충은 금빛 초록색의 등이 아름다운 풍뎅이류의 하나였다. 칼 융은 때를 놓치지 않고(뛰어난 사람들은 항상, 때를 놓치는 법이 없다) 그 풍뎅이를 그녀의 손에 건네며 말한다. 

“여기 당신의 황금 풍뎅이가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녀의 합리주의는 허를 찔리고, 그녀의 지성적 저항의 얼음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이것이 여태까지 세간에 회자되는 그 유명한 ‘황금풍뎅이’ 일화이다. 여기까지 말해도 일부 사람들은 그러리라. 그래서 뭐? 

여기에서 병행된 사건들, 이를테면 이전에 예를 들었던 황금풍뎅이 꿈 이야기와 그 시간에 창문을 노크한 황금풍뎅이, 그리고 그것을 그녀에게 건네준 것들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인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호간 그 어떠한 인과적인 관련들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일반적으로 우연적 특성을 지니는 것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병행된 사건들 사이에 단 하나 인식되고 확인될 수 있는 모종의 연결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의 의미(칼 융은 이것을 동류성이라 부른다)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동시성이라고 한다. [페이스 북(마야 최), 2012, 2, 9.]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세상(우주)에는 말(이치)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말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비이성적인 태도로 접(接)해야 합니다. 동시성도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의지나 이성을 넘어설 정도의, 사람의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인과율을 초월해서, 칼 융이 만난 ‘황금 풍뎅이’처럼, 그에 부합하는 현상(자연적, 사회적)을 불러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과성에 종속되지 않는 것이므로, 현상적 관계로서는, 그것은 병행이거나 병발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종속절 관계가 아니라 대등절 관계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마냥 일회성 우연만은 아님으로 해서, 기적이나 이적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 ‘동시성의 원리’라고 이름 붙인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요약인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런 논리가 성립되면, 작금의 ‘첫사랑’의 범람도 어떤 동시성의 원리가 작동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는 견고한 꿈이었고, 누구에게는 그 꿈으로 들어가기 위한 간절한 열쇠였던 ‘황금 풍뎅이’가, 동시성의 원리 안에서, 그들의 창문을 두드렸듯이, 지금 ‘첫사랑’이라는 황금 풍뎅이가 우리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말씀입니다.     


뜬금없는 소리 같습니다만, 20년 전 쯤의 영화 『서편제』(임권택, 1993)가 생각납니다. 상업 영화에 혹사된 감독의 예술적 정열을 위해 제공된, 일종의 ‘안식년’ 개념으로 제작된 영화라 들었습니다. 돈 벌기 위한 영화를 찍느라 고생이 많았으니 평소에 만들고 싶은 예술영화를 한 번 만들어보라는 일종의 보너스와 같은 작품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오히려 돈을 목적하지 않았던 ‘예술’이 더 큰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생각 밖으로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호응이 컸습니다. 특히 중장년층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 민족 특유의 한(恨)의 정서에 크게 어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때 그 현상을 보면서 남도소리(회복되어야 할 가치), 김영삼 대통령(문민정부), 전통회복(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심청가(아이고 아버지!), 눈물(회한어린 의례) 같은 동시대의 드러난 기표들을 한데 묶어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어디엔가 쓴 적이 있습니다. 그것들의 배후를 흐르는 그 무엇이 『서편제』라는 영화를 부른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부름을 받은 이는 칼 융처럼, ‘황금 풍뎅이’를 간절하게 생각해 온 진정성을 지닌 한 노련한 예술가였고요.     

20년 전의 『서편제』는, 모진 세월을 만나 불우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 땅의 모든 ‘못난 애비’들에 대한 성대한 복권(復權) 의례였습니다. 성가(成家)를 이룬 장성한 자식들은 못다 이룬 ‘부자유친’의 꿈을 그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그 행사의 주제가가 심청가였던 것입니다. 그 질펀한 ‘눈물의 파티’를 딛고 비로소 우리의 못다 쓴 가족(父子) 정체성 서사가 어떻게든 기승전결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해방 후 50년, 종전 후 40년이 지난 땝니다. 이른바 베이비부머들이 장년층에 진입하는 때였지요. 왜 서편제고, 왜 심청가고, 왜 아버지고, 왜 오래된 약속이었는가? 저는 그때 한 마리의 ‘황금 풍뎅이’를 보았습니다. 미완의 가족(부자) 정체성 서사에 대한 간절한 완결의 의지와 욕구가 ‘깊고 푸른 흐름’으로 그 시대를 관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황금 풍뎅이가 나타난 지 20년 뒤, 지금 또 홀연히 우리 앞에 ‘첫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그것 역시 ‘황금 풍뎅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 ‘첫사랑’은 과연 어떤 기표들을 대동할까요? ‘아버지의 노래’가 ‘첫사랑의 노래’로 바뀌는 이 시대의 유효한 ‘코드와 맥락’은 무엇일까요? 지난 연말부터 갑자기 불어닥친 이 첫사랑의 기표들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뱃전을 두드리며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며 울던 딸자식의 눈물 젖은 자리를, 잊지 못할 아련한 ‘첫사랑’을 그리는 중늙은이들의 허전한 뒷모습이 차지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황금 풍뎅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2012. 3. 28.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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