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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29. 2019

추성훈이라는 선량한 기호

댄디와 마초

추성훈이라는 선량한 기호   

  

‘추성훈’이라는 유도 선수 출신 연예인이 있습니다. 현재는 그가 배우인지 가수인지 모델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그를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저는 그를 선량한 기호라고 부릅니다. 누구든 보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선량(善良)한 기호(記號)입니다. 추성훈이 ‘보기에 좋은 사람’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오늘 생각해 보려는 것은 바로 그 문제입니다. 얼굴로 치면, 추성훈은 일종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입니다. 그가 눈이라도 한 번 부릅뜨면 웬만한 사람들은 그냥 주눅이 들 겁니다. 그의 눈빛에 따라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험’과 ‘악’이 공존하는 평면이 됩니다. 그런데 그가 눈웃음을 치며 어눌한 한국어 솜씨로 애교를 떨 때면 오로지 ‘선’과 ‘량’만 있는 얼굴이 됩니다. 격투기에 임할 때의 얼굴은 또 어떻습니까? 그 처절한 진지함에 관중들은 또 압도됩니다. 그러니까, ‘얼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추성훈이라는 기호를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얼굴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옷맵시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비슷한 터프 가이이지만 추성훈은 최민수 스타일은 아닙니다. 배정남 스타일도 아니고요. 늘 단정합니다. 그의 얼굴과 그의 복장은 묘한 앙상블을 이룹니다. 부조화의 조화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보기에 좋은 옷맵시입니다. 그 다음은요? 그가 보기에 좋은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요? 이른바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미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무심결에 옷 안에 감추어진 그의 아름다운 신체를 생각합니다. 그의 몸이 마치 내 것이나 되는 듯한 착각도 간혹 듭니다. 그의 몸에 대해서 여성들이 느끼는 모종의 무의식적 감성 같은 것은 저로서는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무엇이 있을까요? 누가 그의 탈이념성, 혹은 무국적성도 매력의 한 포인트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댄디와 마초라는 상극적인 것의 절묘한 융합과 더불어 그런 후기 산업사회의 나르시시즘적 소비 특성을 만족시키는 그의 시대성 있는 캐릭터 성향이 때맞추어 유효타를 날렸다는 겁니다. 그는 ‘거절당한 경험’ 속에 웅크리고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발판삼아, 도전적으로, 무국적성으로, 딛고 일어서서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즘 소비 행태가 지배하는 후기산업사회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는 겁니다. 그 덕분에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그는 이룰 수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면, 추성훈이 ‘보기에 좋은 사람’이 되는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설명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이 말씀을 드리고 있는 거구요. 추성훈이라는 기호는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우연의 일치 같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성공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결연한 선택과 부단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 결과가 후기산업소비사회의 한 특성(나르시시즘)을 기대 이상으로 만족시킨 것은 그의 행운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것 아니더라도 그는 다른 이유를 대동하고 우리 앞에 반드시 다시 나타날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자주 쓰는 말로 표현하자면  그 역시 ‘오래 지속되는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일희일비, 시류에 영합하며 사는 이가 아니라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일관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이라는 겁니다. 달리 말한다면 그는 무엇의 결과가 아니라 무엇의 원인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왜 추성훈인가’ 묻고, 표면적인 기호학적인 설명을 늘어놓는 것은 선량한 설명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덜 된 논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추성훈’은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입니다. 거기에는 기호학적인 논리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이 자리에서 “천재가 하는 일에는 원인이 없다”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추성훈은 ‘원인으로 설명될’ 결과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추성훈이 지니는 댄디와 마초, 그 묘한 상극적인 것의 융합과 탈이념적(국가, 민족적) 정체성은 자신의 실존을 뭉개버리려는 것들에 대한 강력한 저항 수단이며 유일한 존재증명의 수단이었지 무엇을 노리고 꾀한 기획이 아닙니다. 저급한 것들에 의해 자행된 모독과 모욕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분노,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끝까지 가지고 가야할 자존심과 자기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용서하고 넘어서고 고수한,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집합체가 바로 ‘추성훈’이라는 기호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것은 ‘추성훈’이라는 기호가 지닌 모종의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인간만이 획득할 수 있는 생명의 에너지입니다. 윌리엄 포크너가 말했듯이 “기계는 오래 견디고, 동물은 생존하지만, 인간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승리하는 인간입니다. 그를 통해서 각인된, 어디로부턴가 선물로, 인간만의 승리하는 힘을 우리는 기억하고 상찬하여야 합니다. 그와 함께 우리 앞에 있는 모든 ‘보기 좋은 인간’들을 경애하여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한 ‘어눌한 경계인’이 일약 광고계의 신데렐라로 부상하고, 드라마에 깜짝 출연도 하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와 꾸준한 즐거움을 주는 것을 고작 후기 산업사회의 한 ‘소비행태’와 연관 짓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그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요즘은 배정남이 대세인 것 같습니다. 그에게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오래 전 작성.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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