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Apr 18. 2019

벌레 같은 사랑, 소나기(완결편)

소나기, 대동강, 어머니

벌레 같은 사랑소나기   

  

“인간은 벌레다”, 진화론을 신봉하는 생물학적 인간관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은 유전자가 자신의 존속을 위해서 시키는 것이고, 우리 인간은 오직 그 명령을 이행하는 기계적인 존재, 이를테면 숙주(宿主)에 불과하다고 하니 우리 신세가 벌레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여기저기서 생물학적 인간관의 안내를 받다보면 자연스럽게 “인간은 벌레다”라는 비문(非文)이 뇌리에 각인된다. ‘비문’이라는 표현은 물론, 내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생물학적 인간관의 입장에서는 여러 고급 종교의 ‘말씀’도 따지고 보면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들이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아상(我相)은 본디 없는 것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은 원죄를 가진 한갓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런 두 ‘말씀’은 공히 인간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정되고 있는 존재일 뿐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벌레와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해방 담론, 『장자(莊子)』에서도 그 비슷한 취지를 볼 수 있다.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 나오는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 이야기다.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절름발이에 꼽추에 언청이인 사람)이 위나라의 영공(靈公)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했다. 지혜가 깊고 사리에 분별이 명확해 영공은 그의 말에 아주 흡족해 했다. 그 뒤로는 영공이 보기에 온전한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들의 목이 야위고 가냘프게 보였다(而視全人 其脰肩肩). 인간의 감각적 판단이 자립(自立)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종속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그게 감정이라면 감정이겠고, 주관이라면 주관이겠다. 병신(病身)의 육체가 오히려 온전한 신체를 불완전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 그것이 사람의 눈이라는 것. 사람의 인식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라는 것, 우리의 생각을 좌우하는 것은 눈 앞에 있지 않고, 오히려 눈 뒤에 있는 그 무엇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그 ‘무엇’이 인간 안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종교적인 ‘말씀’들과는 다름이 있다. 

     

인간이 하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엇을 쓰고 그리고 행동하든, 그것을 조정하고 자신을 주장하는 것은 언제나 ‘뒤’에 있다. 눈 앞에 둔 것은 그저 ‘아상’이나 ‘원죄 있는 존재’거나 ‘벌레’거나 ‘병신’일 뿐이다. 아상(我相)이지만 허상(虛像)이고, 거룩한 존재이지만 피조물이다. 그런 입장에서 소설 「소나기」를 한 번 살펴보자.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는 많은 이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첫사랑 이야기다. 나는 초등학교 때 형의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 그것을 훔쳐보았다.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에서 한 번, 소년과의 추억이 담긴 스웨터를 입혀서 묻어달라는 소녀의 유언을 전해 듣는 대목에서 한 번, 가슴이 찌릿했다. 나중에 교사가 되어서 그 작품을 어떻게 가르쳐야 되나, 교사용 지도서나 참고서 같은 것을 봤더니, ‘소년기의 청순한 사랑’이라고 가르치라고 되어 있었다. 작가(3인칭) 관찰자 시점, 길가다 만난 농부의 “소나기가 오겠다”라는 말은 복선, 대층 그런 것들이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요즘은 생물학적 인간관이 대세이니 그쪽 화법 식으로 설명을 해보자. 「소나기」라는 소설을 만들게 하고 그 내용을 이리저리 조정하는 유전자는 모성(母性) 콤플렉스다. 황순원 선생은 소설 「소나기」로 ‘어머니’를 이야기한다. ‘소녀’는 그러니까 ‘벌레’다. 진짜는 따로 있다. 어머니가 있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 특히 남자들에게는 평생 강하게 작용하는 것, 어떤 예술가들에게는 창작의 동력을 제공하는 것, 그 모성 콤플렉스가 「소나기」의 유전자다. 먼저, ‘콤플렉스(complex)’라는 말에 대해 의견 조절을 좀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말이 질병과 관련되어 있다는 편견부터 버려야 한다. 콤플렉스는 마음 상태가 좀 복합적이라는 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에너지가 흐를 때(심리라고 총칭할 수도 있지만 그 표현으로 포괄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것이 한 부분에 가서 좀 복잡한 반응을 야기하는 경우 우리는 그곳(공간적인 비유다)을 심리 에너지의 복합적인 결절점(매듭),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반도체와 흡사한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심리 에너지 흐름이 일정한 저항을 받으며 왜곡이 일어나고 에너지의 강도에도 변화가 오는 부분이다. 모든 작가들이 다 그렇듯이, 황순원 선생에게도 그것이 창작의 원동력을 제공한다. 그 지점이 어디냐는 것은 물론 추측이다. 소설을 보고 유추한다. 소설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콤플렉스의 보고다. 그것을 읽고, 그것을 쓰면서, 우리는 우리 안의 콤플렉스와 경쟁도 하고 화해도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그런 성가신 작업이 필요 없으면 구원을 받은 것이거나 도에 들거나 해탈한 것이다).   

  

「소나기」가 모성 콤플렉스의 소산, 내 안의 작은 인간, 아들 연인(son-lover)의 사모곡이었다는 것은 ① ‘소녀’가 ‘높은 물’에서 ‘낮은 물’로 스스로 내려온 존재라는 것(선녀 모티프), ② ‘소년’이 수동적인 성(性) 파트너라는 것(어머니의 시혜적 사랑을 기다리는 어린 연인), ③ ‘소녀’가 죽는다는 것(절대적인, 희생의 연인), ④ ‘소녀’가 죽으면서 ‘소년’의 체취가 묻어있는 스웨터를 같이 묻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절대적인, 불멸의 연인), 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무시간성 위에서 전개된다는 것(사회역사적인 계기를 무시하는 인간 심리의 근원적인 부분을 다루는 심리소설),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소녀는 소년에게 스스로 와서, 그에게 삶의 지극한 즐거움을 주고, 죽어서 불멸의 연인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언제 어디서 일어난 일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다 아는 일이지만, 그런 줄거리, 그런 사랑은 당연히 지상(地上)의 연애에서는 없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스토리텔링이다. 그런데 모두 언젠가 있었던 일인 양 받아들인다. 어떤 이는 작가의 실제 소년 경험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래서 그건 공동환상의 영역에 속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무의식적 원망(願望)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나기」의 사랑은 지상에는 없다. 다만 우리의 숨겨둔 욕망 안에서나 있을 뿐이다. 있다면, 오직 아들 연인의 사모곡, 그런 연인(어머니 같은)을 만나고 싶은 무의식적 충동의 예술적 표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황순원 선생의 소설은 언제나 에로티즘을 그 한 가운데에 둔다. 그가 다루는 사랑 이야기는 다종다양하다.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격동기의 사랑, 육체적 사랑, 심정의 사랑, 신성의 사랑, 소년기 사랑, 청춘의 사랑, 파멸의 사랑, 구원의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름 붙이기 힘들 정도의 오묘한 사랑, 정말이지 사랑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그 중에서도 소년기 사랑에 대한 선생의 특별한 관심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아마 선생은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꼭꼭 감춰둘 수도 있었던 ‘아들 연인’을 기꺼이 무대 위로 올려보내신 것 같다. 그 덕에 여태껏 내게도 선생이 내리신 지상의 선물이 귀에 생생하다.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라는 소설 속의 한 대목처럼.    

 

사족 한 마디 : 나도 '사모곡' 한 편 쓰고 싶다. 어머니가 나를 낳은 건 제주도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였다. 사굴(蛇窟)로 유명한 구좌읍 김녕리에서 나를 낳았다. 7,8년을 거기서 살았다. 어머니는 늘 “그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라는 말로 나의 출생과 관련된 제주도에서의 삶, 낯설기만 했던 그 이국적인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했다. 나를 낳을 때 출혈이 심했다는 것이다. 제주도는 그렇게 내게 원죄의 신화가 되었다. 모든 홀로 남겨진 아들들의 신화가 그렇듯 나는 죄 많은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몸이 결정적으로 쇠약해지는 동기를 제공한 나는 그 원죄를 짊어지고 어머니의 강적들, 그 불패의 세속에 대항하여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 했다. 적어도 어머니와 나 사이에서는 그런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명확하게 성립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여태 내 분노와 슬픔의 최종적인 배후로 존재한다. 내 존재 신화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연관된 기표는 늘 눈물을 자아내고 노여움의 씨앗을 뿌린다. 그래서 내게 어머니라는 단어는 내내 습기 찬 그 무엇이다.     

그러나 눈물과 분노의 기표 어머니에게도 황금기가 있었다. 어머니의 황금기는 대동강과 함께였다. 어머니가 가끔 평양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할 때는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평양(‘피양’이라고 어머니는 발음했다)에서는 관사(官舍)에서 살았지. 김일성대학하고는 담장을 같이 썼더랬는데.....”

그렇게 시작하는, 어머니가 들려준 말 중 기억에 남아 있는 그림은 다 끌어 모아도 몇 점 되지 않는다. 휴일이면 맏형(이 형은 이북에 남겨두고 월남했다)을 데리고 모란봉에 놀러가곤 했다는 것. 옆 관사에 살던 누구에게 부탁해(아마 교육장쯤 되는 이였을 것이다) 나발이나 불면서 빈둥거리며 놀고 있던 외삼촌을 평양 시내의 한 소학교 교사로 취직을 시켰다는 것. 동란 통에는 끔직한 것도 많이 보았는데, 한번은 일요일 날 B29가 대학 운동장을 때려서 탁구대회 중이던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고, 피를 철철 흘리며, 트럭에 실려 나갔다는 것. 그 후 외삼촌이 징집되어서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었다는 것(출정식 때 외삼촌은 맨 앞에서 나발을 불며 나갔다고 했다. 그 슬픈 이야기도 어머니는 동화 구연하듯이 담담하게 또박또박 전했다) 등이 전부다. 아마 더 있었을 것인데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정도다. 아버지가 평양에 간 것은 김일성 정부가 들어선 직후였다. 일본인들이 빠지고 난 뒤의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해주 시멘트 공장의 임시 지배인으로 있던 아버지를 평양으로 불러올렸다. 어머니에게는 평양 생활이 꽤 만족스러웠던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성분 좋은 노무자 출신 당 간부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눈칫밥을 먹고 지내던 해주 관사보다는 훨씬 나았으리라 짐작이 된다. 나이도 젊었고, 나이에 비해 아버지가 받던 대접도 괜찮은 것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거기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짧았던 대동강 가의 황금기가 어머니에게 요구했던 대가는 너무 가혹했다. 스물다섯 살의 어머니는 그 짧은 인생의 황금기를 뒤로 하고 차마 삭힐 수 없었던 모진 이별들을 한꺼번에 다 겪어야 했다. 삶의 안락한 근거와, 부모와, 동생과, 자식을 모두 잃어야 했다.

출신 성분이 나빴던 아버지는 매일같이 자아비판에 시달리다 요양을 핑계로 장수산으로 들어가고, 친정에 내려가 있던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월남을 결심한 아버지에게 인편으로 연락을 받았다. 인천으로 갈 것이니 언제까지 어디로 오라는 것이었다(아버지는 인천상업 출신이다).

“눈발도 어지간한데 큰아이는 두고 가려무나. 길어도 한두 달이면 돌아올 텐데...”

사정을 모르던 외할머니는 새벽을 기다려 집을 나서는 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데리고 가야죠.”

어머니는 큰아이의 손을 잡고 동구 밖까지 나왔다. 작은아이는 등에 업었다. 살을 에는 바람이 눈발을 모래알처럼 흩뿌렸다. 앞이 캄캄했다. 머리에 인 보따리는 무겁기만 한데 날은 어둡고 갈 길은 멀었다.

“나, 할머니한테 갈래!”

그때 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따라오던 외할머니 쪽으로 달려갔다. 달려 들어온 아이를 치마폭에 감싼 외할머니는 멀리서 어여 가라는 손짓을 했다. 등에 업은 아이와 머리에 인 짐보따리가 사람의 발걸음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게 끝이었다. 왜 그렇게 허무하게 첫아들과 헤어져야 했는지 어머니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나한테만 소곤거리듯 말했다. ‘너라면 어떡했겠니? 설마하니 그런 생이별이 있을 줄 어떢케 알았갔니?’라고. 

“그게 다 니 아버지 탓이란다. 좀 찐득하게 참고 지냈으면 될 일이었는데, 그렇게 싫은 소리 듣는 게 싫어설랑은.....”

그렇게 아버지도 죄인이 되었다. 물론 어머니도 진심은 아니었다. 그런 말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어서였다. 자식을 버리고 온 어미가 무슨 할 말이 따로 있었겠는가. 그건 나중에 알았다. 외할아버지는 왜정 때 수원고농을 나온 인테리였고 해방 직전에 돌아가셨다. 학창시절 친구들이 여러 명 평양에 있었다. 외삼촌이 아무런 자격도 없으면서 하루아침에 교사로 발령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생의 양극단을 다 보여준 것이 바로 대동강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원망, 자기혐오를 가리기 위한 명랑(明朗)을 보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어머니는 마흔이라는 이른 나이에 부모와 첫아들과 하나뿐인 동생과 그리고 그 나머지 것들과도 완전히 헤어졌다. 나와는 10년 남짓 이 세상을 같이 했을 뿐이다. 생각하면 어머니는 나에게 많은 짐을 넘기고 가셨다. 너무 일찍 어린 아들에게 당신의 짐을 부리셨다. 

10년 남짓, 그 짧은 사이, 어머니가 내게 들려준 말 중에서는 그래도 대동강이 가장 볼 만했다. 대동강, 어머니의 황금기, 그 볼 만했던 청춘이 그나마 나에게는 위안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길거리마다 널려있는 대동강이란 반점(飯店) 상호를 볼 때마다, 그 춘장 냄새 요동치는 간판을 볼 때마다, 출처를 알 수 없었던 불같은 용심(用心)이 불쑥불쑥 돋곤 하던 것이...

<2012. 4. 18. 오늘 아침 일부 수정>

작가의 이전글 나는 새가 떠나고 구름만 빽빽할 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