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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23. 2019

엉덩이가 나무뿌리에 곤궁함이라

주역, 택수곤

엉덩이가 나무뿌리에 곤궁함이라   

 

학창 시절 학생회 일을 하면서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하나 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마 선배들에게 물려받았던 말이었을 겁니다. 요즘과 달리 옛날에는 학생회 일이 하나부터 열까지 ‘자력갱생’이었습니다. 이런저런 행사에 인원을 동원하고 업자들을 만나고 장치를 시설하고 진행하는 일들이 늘 힘에 부쳤습니다. 거의 매번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었고 하는 일마다 막노동 수준이었습니다. 선거로 집행부가 바뀌면 이전 집행부와는 아예 만날 일이 없었습니다. 경험을 가진 선배가 도와줄 일도 없었습니다. 모든 게 어려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은 ‘싸움 말리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웃는 얼굴로 만났다가 일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매번 으르렁거렸습니다. 출신 지역도 다르고 출신 학교도 다르고 성격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힘든 일을 하다 보니 틈만 나면 서로 싸웠습니다.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제게는 그 싸움을 말리고 조직의 화목을 조장하는 일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덕분에 좋은 공부를 많이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싸우지 않는 자가 가장 행복하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해 주었으니까요. ‘배운 대로 살자’, 그 덕분인지 결과적으로는 제 인생이 ‘요리조리 싸움을 피해서 살아온 역정’으로 점철되긴 했습니다만 아직 그 부분에서는 후회가 없습니다. 어제도 힘들게 병마와 싸우는 친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병마는 그 모든 것들을 무효로 돌리는 힘을 가졌습니다. 하루 종일 마음이 무겁습니다. 내게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될까, 그 남은 인생 중에서도 병마와의 싸움을 요리조리 잘 피해 갈 수는 없을까라는 턱없는 바람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 상황 때문인지, 오늘 펼친 주역 책에서는 궁필통(窮必通)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곤은 형통하고 바르고 대인이라야 길하고 허물이 없으니 말이 있으면 믿지 않으리라. (困亨貞 大人吉无咎 有言不信)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358쪽]     


주역 마흔일곱 번째 ‘택수곤’(澤水困), 곤괘(困卦)의 경문입니다. 궁하면 반드시 통하고, 곤궁에 처하여 스스로 통할 수 없는 자는 소인이다(窮必通也, 處困而不能自通者, 小人也)라고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편 제2장에 나오는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가 세상사의 보편적인 원리를 밝히는 말이라면 이 구절은 주체의 능동성을 강조한 말이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통하는 일’(自通)이라고 밝혀놓고 있습니다. 그저 궁함에 처해서 변화의 기미만을 기다리고 앉았거나 ‘입만 숭상’하다가는 신의를 얻지 못하고 막혀서 끝내 다시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處困而言 不見信之時也. 非行言之時, 而欲用言以免, 必窮者也)     


‘궁해야 통한다’는 사실 저의 좌우명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중학교 시절부터지 싶습니다) 무언가 탈출구가 필요할 때면 자작(自作) 굴을 파고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모든 바깥 것들과 단절하고 공부에 매진하거나 종교에 심취하거나 운동에 몰두했습니다. 그때마다 주변의 친구들은 저의 사회적 실종 상태를 타박했습니다. ‘얼굴 좀 보자’라는 말을 자주 듣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몰락(沒落)의 처신으로 간주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자초하는 궁함은 항상 새로운 돌파구가 되곤 했습니다. 변신을 동반한, 저의 귀환이 친구들은 놀라게 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고나서도 그 버릇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 저의 좋은 동반자가 되고 있는 검도나 글쓰기도 모두 그런 ‘동굴 체험’의 소산입니다. 청년기 때의 일입니다. 서울살이를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와 암중모색 할 때였습니다. 그때도 ‘궁필통’을 주문처럼 외우며 굴을 깊게 파고 있을 때였습니다. 고3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직장생활 때문에 멀리 덜어져 있던 문우(文友)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도 그렇지만, 저에게 늘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편지에도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고 마치 수학 공식처럼 착실하게 살아가는 자네가 부럽네”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한 번도 일탈을 보여주지 않는 모범 시민의 삶을 제가 살고 있어서 보기가 좋다는 뉘앙스였습니다. 그때는 이미 ‘궁필통’이 제 몸에 많이 새겨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인물평이 참 생소했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울퉁불퉁하기 짝이 없는 고단한 인생인데 ‘수학 공식처럼’이라니, 남들이 보기에는 저의 ‘굴 파기’가 어쩌면 엄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습니다. 그때는 “전혀 ‘수학 공식’이 아니다. 오로지 암중모색만 있다.”라고 구구절절이 써서 답장을 보냈습니다만, 지금 와서 보니 그 친구의 말이 맞았습니다. 수학공식처럼 살아온 게 맞았습니다. ‘궁필통’을 믿고 꾸준히 살아온 게 ‘수학 공식’이었습니다. 곤괘(困卦) 초육(初六)의 효사(爻辭)가 그 인생 공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육은 엉덩이가 나무뿌리에 곤궁함이라, 어둔 골짜기에 들어가서 삼 년을 보지 못하도다. (初六 臀困于株木 入于幽谷 三歲不覿) -- 가장 밑에 처해 침체되고 비천하게 곤궁하여 거함에 편안한 바가 없으므로 ‘둔곤우주목(臀困于株木)’이라 하였다. 그 응함(九四)에 가고자 하나 이효가 그 길을 막으니 가만히 있으면 나무뿌리에 걸려 곤궁하고, 나아가도 구제받지 못하니, 반드시 은둔할 것이므로 ‘입우유곡(入于幽谷)’이라 하였다. 곤(困)의 도는 몇 년을 지나지 못하는 것이니, 곤궁해져서 숨고 곤궁함이 풀리면 나오므로 ‘삼세부적(三歲不覿)’이라 하였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360쪽]    

 

어제 하루 종일 모종의 ‘싸움’에 참여하고 돌아와서 심신이 매우 곤했습니다. 잠시 “끝까지 왜 피하지 못했지?”라는 자책감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피할 명분이 없었는데 이번에 가서 그것을 얻어온 것 같습니다. 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정에 깨서 이 글을 적습니다. 자나 깨나 세상은 늘 곤궁합니다. 어제 그 싸움터에서 만난 여러 ‘곤궁에 처한 자’들도 모두 ‘궁필통’ 하기를 기원해 봅니다. 개중에는 자작 굴을 파고 들어앉은 자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곤궁에 처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천방지축으로 싸우고 있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위에 앉은 자나 아래에 앉은 자나 모두 곤궁에 처해 있는 자들처럼 보였습니다만 분명 제가 모르는 ‘구제’와 ‘은둔’이 필경 있을 겁니다. 문득 몇 년 전, 제가 굴속에 깊이 들어앉아 있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모종의 업무상의 일로 행정 일을 보는 직장 동료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이런저런 업무상의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는데 불쑥 그 여직원이 저에게 “교수님 지내시기 불편하시겠어요~”라는 걱정 어린 위로의 말씀을 선사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사실 그때가 제겐 아주 좋았을 때였거든요. 모든 ‘싸움’에서 물러나 좌우와 단절한 채 마음껏 쓰고 싶었던 글을 써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껄껄대며 “저 아니거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세월이 지나고 지금은 그런 ‘위로의 대상’이 되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제 인생 공식대로 궁필통이 성사가 된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는 정 반대의 말도 한 번씩 듣습니다. “요즘 잘 나가시데요~”, 얼마 전에는 그런 과분한 공치사도 들었습니다. 동료 교수 한 분과 역시 여성 직원 한 분에게서입니다. 어디서 그런 낌새(?)를 느끼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참 재미있는 격려 말씀이었습니다. ‘잘 나간다’라는 말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고요. 굴 파기 전문가에게 ‘잘 나간다’라는 말은 더 깊이 굴을 파 나가라라는 뜻이겠죠? 어쨌거나 인생만사 ‘궁필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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