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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24. 2019

사랑과 야망

스탕달의 적과 흑

사랑과 야망적과 흑     


대학 1학년 때,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었다. 그 소설의 주제처럼, 그때는 ‘사랑과 야망’ 그 두 가지 주제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 그것 이외의 삶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희생이니 구원이니, 사랑과 몰입을 통한 구도적(求道的) 자기실현이니 하는 것들은 아직 내 인생 목록에 오를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온전한 인간의 형상을 갖추기 전이었다.

그 무렵 서양 소설 중에서 정독한 것은  『적과 흑』이 유일했다. 2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공으로 들어가면서 식민지 시대나 6.25 전쟁기의 한국소설을 주로 읽었다. 학과 공부와는 별개로,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아직은 ‘습작’ 때문이라고 말할 계제는 아니었다) 문예지에 게재되는 당대 소설도 때를 놓치지 않고 읽으려고 노력은 했다. 이청준, 황석영, 오정희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들 모두 『적과 흑』과는 달리 모종의 의무감에서 이루어진 독서였다. 목적에 종속된 것들은 여하튼 노역(勞役)의 혐의를 완전히 벗을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의무감 없이 본 것은 『적과 흑』뿐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적과 흑』에서는 주인공 쥘리앵 소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나머지 인물, 사건, 배경은 거의 다 지워졌다. 당시의 내 정체성을 비추어볼 수 있었던 한 영악한 출세주의자의 비극적인 삶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적과 흑』은 대학 신입생 시절 한 친구가 마치 도시락통처럼 매일같이 끼고 다니던 것이다. 그것을 강탈하다시피 빌려서 읽었다. 제법 두툼했던 책이다. 아마 그 친구가 매개(媒介)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책에 관심을 가질 일도 크게 없었을 것이다. 그 친구하고는 매번 같은 것을 좋아했다. 담배도 부담 없이 번갈아 물었고, 청바지도 한 벌로 함께 나눠 입었다. 학교에서는 거의 붙어 다녔다. 거의 동성애 수준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 우리는 서로, 르네 지라르가 말한, ‘욕망의 상호중개자’로 살았던 것 같다. 심지어는 한 여학생의 총애(寵愛)를 분별없이 서로 탐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원래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성미라 얼른 양보했더니 그 친구도 이내 그 여학생 따라다니는 짓을 그만두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경쟁자가 없으니까 갑자기 재미가 없어지더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웃기는 짬뽕’ 짓만 하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런 것들을 배경으로 해서 기억의 목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바로 『적과 흑』이었다. 그런데 때 아니게 그 『적과 흑』이 다시 나타났다. 그 영악한 주인공 쥘리앵 소렐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문학 속의 에로스』라는 책을 읽을 때였다.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그 때의 쥴리앙 소렐이, 그 지겨운 자화상이, 불쑥 얼굴을 디밀었다.    

 

... 소설 『적과 흑』은 성장 소설의 구성 안에 담긴 한 영악한 출세주의자의 이야기다. 탁월한 정신적 재능과 비범한 의지력을 가진 젊은 남자 쥘리앵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언제나 버림받은 아이처럼 살았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 오만함에 어울리는 경력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기회든지 움켜쥘 각오가 되어 있었다. 스탕달의 개인적 경험에 따라 이런 방식의 삶이 도박이라는 것은 룰렛 도박판의 두 색깔을 암시한 책의 제목(빨강과 검정)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제목은 그가 꿈꾸는 출세를 위한 사다리로 제시된 두 영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검정은 사제의 옷 색깔로서 왕정복고 시대 민중 출신의 재능 있는 젊은이는 바로 이 영역에서 사회의 상층부로 올라갈 길이 가장 많이 열려 있었다. 쥘리앵은 거짓으로 선한 척하며 조롱 섞인 의식으로 신분 상승을 시도한다. 한편, 피와 불의 색깔 빨강은 전쟁을 나타내는 것으로, 용기와 대담함으로 자신을 부각시켜서 장군으로까지도 올라갈 수 있는, 전쟁에서의 기회를 뜻한다. 나폴레옹의 승리에 찬 전쟁 기간 동안 쥘리앵과 같은 성향의 젊은이들에게 탐나는 가능성이었던 이 꿈은 이제는 지나간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동시에, 빨강은 또한 에로스, 즉 성(性)적인 정열을 상징한다. 쥘리앵은 무엇보다도 이런 성적인 정열을 통해, 신분 상승을 향해 가는 길에 놓인 사회적 제약들을 깨뜨리고 있다. 또 하나의 길, 정열의 빨간 길은 유리한 기회를 통해서, 그리고 모든 면에서 아주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젊은 남자가 여자들에게 뿜어내는 광채를 통해서, 그의 앞에 열린다. [중략] 문헌학적 기벽을 지닌 사람들은 쥘리앵의 성(姓) 소렐Sorel을 거꾸로 읽으면 의미심장하게도 ‘에로스l'eros’라는 글자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스탕달이 이 소설의 핵심 의도로 제시한 ‘1830년의 시대상’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는 당대 사회 묘사 아래 감추어진 신화적 층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80-81쪽, 인용자 일부 수정 ) 

    

공연한 짓이긴 했지만 그 친구와는 나는 서로 자신이 더 쥘리앵 소렐과 닮았다고 다투곤 했다. 그야말로 꼴값을 떨었는데, 막상막하긴 했지만, 한 가지는 인정이 된다. 그때는 그 친구가, 지금 생각해도, 쥘리앵 쪽에 더 가까운 외모와 성격(character)이었던 것 같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채 여자들에게 광채를 뿜어내는 것’이 그 친구에게는 있었다(엄숙 인자하신 장로님이 된 지금도 그건 여전하다). 어쨌든,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주는 것이니까,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문학 속의 에로스』라는 책은, 그런 우리에게 ‘꿈 깨라’고 말한다. 쥘리앵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은 그도 저도 아닌, 스탕달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스탕달의 회고록에 보면 그가 열일곱살 때 학년 전체에서 가장 우수한 수학 점수를 받고서 파리에 있는 파리 기술대학으로 떠날 때 삼촌에게서 들었던 충고가 기록되어 있다. 그의 삼촌은 아주 사랑스러운 남자로서 많은 연애를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사업에는 관심이 없어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이었다.     


“얘야, 넌 머리가 좋지, 수학 과목에서 그렇게 우수한 성적을 받았으니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구나. 하지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은 오직 여자들을 통해서만 위로 올라갈 수 있다. 넌 못생겼지만 사람들이 네가 못생겼다고 비난하지는 않을게다. 개성을 갖고 있으니까. 앞으로 네 애인들이 너를 버리고 떠날 텐데 지금 하는 내 얘기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대로 실천해라. 버림을 받은 순간에는 누구나 자신을 우습게 여기기가 아주 쉽다. 그런 일이 한 번 일어나면 남자는 다른 여자들 눈에 아주 형편없는 존재로 보인다. 그러니까 버림을 받거든 24시간이 지나기 전에 얼른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해라, 더 나은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하다못해 하녀에게라도 괜찮다.”(87쪽)     


스탕달은 삼촌에게 경탄하고, 전수받은 지혜를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소설 『적과 흑』은 그의 그런 사적인 노력이 문학이라는 사회적 자산으로 거듭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스탕달은 쥘리앵을 자신의 억센 모습과는 반대로 섬세하고 창백하고 소녀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젊은 남자로 묘사하였다. 그로 인해 스탕달이 잠재적인 동성애자일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었지만, 이는 심층심리학에서 자주 말하는 ‘내 안의 작은 아이’일 공산이 크다. 미소년의 겉모습을 지닌 쥘리앵은 남성적인 공격성이 탈색되어 레날 부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적인 매력으로 대두된다. 그는 그녀에게서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준다. 동시에 쥘리앵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삼각형 안으로 들어간 경탄스럽고 사랑스런 아들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그는 ‘아들-연인’의 한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채 여자들에게 광채를 뿜어내는 것’이다.

청년기, 격동의 감정, 선망과 좌절로만 채색된, 그 빨강과 검정의 시대에, 쥘리앵에게 그렇게 매혹되었던 데에는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쥘리앵이 소설 속에서 보여준 수많은 모습만큼이나 여러 가지일 것이다. 이번에는 그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어쩌면 너무 당연한 감정이라 생각거리가 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유를 하나 발견했다. 스탕달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내 안의 ‘섬세하고 창백하고 소녀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남자’를 쥘리앵에게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찾은 것은 아닐까? 그 친구나 나나 서로에게 그렇게 끌렸던 이유도 아마 우리가 특히 그런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남모르게 감추어두기만 했던 그 얼굴을 상대에게서 보는 것, 그것 말고는 그와 내가 그렇게 붙어 다녀야 했을 마땅한 다른 이유가 없었다(놀기 좋아하던 것도 서로 닮긴 했었다). 헌데, 그건 그렇고, 다시 또 『적과 흑』이 멀쩡하게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는 내 심정이 좀 싱숭생숭하다. 혹시나 쥘리앵이 여태 멀쩡하게, 여전히 내 안에서 활보하고 있었던 것을 여태 눈감아 준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다시 보는 쥘리앵은 하나 늙은 기색이 없다. ‘경탄스럽고 사랑스런 아들’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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