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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22. 2019

어떤 놈

박이화, <어떤 놈> 

어떤 놈    

 

‘어떤 놈’ 생각이 납니다. 그 놈 때문에, 그 놈만 없었어도, 그 놈을 만나서, 내 그 놈을 그냥…, ‘어떤 놈’ 하면, 언뜻 그런 ‘어떤 놈’이 생각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놈’ 하면 귀여운 손주가 생각나시는 분도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제게는 그런 ‘어떤 놈’이 한 놈 있습니다. 웬만한 원한과 설움은 다 묻어두고 딱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 한 놈만 꼽자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때는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 놈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립니다. 그 놈도 제 자식에게는 어진 애비고 지 에미 애비에게는 귀하고 착한 자식일 겁니다. 아무쪼록 그렇기를 빕니다. 그래야 좀 덜 억울하겠습니다. 얼마나 원한이 깊은지, 하루에도 열 번씩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새기고 또 새깁니다. 참 대단한 ‘어떤 놈’입니다. 그렇게 평생 속만 끓이고 있는데 오늘 아침 문득 명쾌한 해석 하나를 만났습니다.    

 

어떤 놈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죽은 듯한

새끼 고양이가 아파트 화단 구석에 

무심히 방치되어 있다.     

어미가 그 곁을 수시로 맴돌므로

치워 주지도 묻어 주지도 못하는 사이

벌써 한 패거리 파리 떼들

풍악 소리 울리며 몰려와 붕붕거리고 있다.     

저 비릿한 주검의 자리가

어떤 놈들에게는 흥청망청 꽃자리였다니

누렇게 달라붙은 눈곱마저 달디 단 꿀이었다니     

그러고 보니 이따금

커다란 화병 속에 한 아름 꽃을 꽂아 놓고

시시때때 코를 박고 킁킁대던 나도 어쩌면

저 몹쓸 파리 떼와 다를 바 없었구나

시름시름 비명 같은 향기 지르며 시들어 갔던

꽃들에게 나는,

한없이 치사하고 야속한 그 어떤 놈이었구나 [박이화, 『흐드러지다』]   

  

그렇습니다. ‘어떤 놈’에게는 또 다른 세계가 있었군요, 그러므로 다른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은 어차피 서로서로 ‘어떤 놈’일 수밖에 없었겠군요, 시인은 그렇게 말합니다. 다른 세상에서 살면서, 같은 세상에서 사는 줄 알고 그렇게 원한을 쌓고 그렇게 원수지간이 되었군요, 내겐 향기였던 것이 그들에겐 ‘시름시름 비명 같은 것’이었는데 그걸 몰랐었군요. 나 좋은 것 하나에 매달려 ‘흥청망청 꽃자리’나 탐하던 나는, 그들에게는 ‘몹쓸 파리떼’처럼 ‘한없이 치사하고 야속한 그 어떤 놈’이었다는 걸 몰랐군요. 그걸 이제야 아는 제가 못난 놈이었습니다. 40년 전에 들었던 “꽃이 지는구나, 못난 놈”(하종오, 『매춘』)을 또 그렇게 듣는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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