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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29. 2019

젊은 여자가 귀하니

주역, 뇌택귀매

젊은 여자가 귀하니     


주역을 읽다 보면 ‘비유의 말로(末路)’라고나 할까, ‘비유적 해석의 한계’라고나 할까, 맥락 파악이 벽에 부딪히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직관, 감정, 이성, 감각을 총동원해서 무언가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데 그런 집합적인 이해에 한계를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주로 경문(經文)과 효사(爻辭)가 말하는 ‘때’라는 것이 현재 우리 현실과 너무 차이가 져서 은유든 환유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로도 보여주지 않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상상력의 자율성이 많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입니다. 쉰 네 번째 ‘뇌택귀매’(雷澤歸妹), 귀매괘(歸妹卦) 효사 중에 나오는 것입니다.    

 

“초구(初九)는 누이동생을 시집보내는데 첩으로써 함이니, 절름발이가 걷는 격이라. 가면 길하리라(初九 歸妹以娣 跛能履 征吉). -- 소녀로 장남(나이든 남자)과 짝이 됨은 정배(正配, 본처)를 이름이 아니요 제첩(娣妾, 연소한 첩)으로 좇아간다는 의의이다. 매는 소녀를 일컬음이다. 소녀가 시집감에는 제첩만큼 좋은 것이 없다. 저 임금의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비록 어리나 잘못된 행위는 아니고, 소녀가 제첩이 되는 것은 비록 절름발이가 걷는 격이지만, 이것이 바로 항구한 의의로 길하여 서로 잇는 도이다. 이로써 나아가면 길함이 당연하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412쪽]     


일부일처제가 정착된 지금으로서는, 어린(젊은) 여자가 나이 든 남자에게 첩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 ‘절름발이가 걷는 격’이라는 설명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현대의 윤리 관념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효사입니다. 당시 상황을 현재의 그것으로 전치(轉置)해서 “자신의 신분을 최대한 낮추어서 진로(進路)에 임한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른 문맥적 해석이 여의치 않습니다. ‘누이동생’, ‘첩’ 등의 단어가 지니는 고유한 의미의 파장을 일일이 다 거두어낼 수가 없습니다. ‘절름발이가 걷는 격’도 “대단히 경사(慶事)로운 일이 찾아온다.” 정도로만 옮길 수 있을 뿐입니다. 귀매궤의 초구(初九)가 전체의 궤상 안에서 그런 역할을 하여야 하는 필연적인 연유도 주역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음 효사에서 실마리를 찾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의 초독에서는 귀매궤에 대한 감상은 생략하고 그냥 넘어갔던 것입니다.    

  

주역이 주로 치자(治者) 계급을 위한 수신 교과서였다는 것이 일부다처를 허용(권장)했던 당시 지배층의 혼습(婚習)을 당연한 전제로 사용하게 했을 것이고, 또 그것이 이루어지는 여러 조건들이 길흉화복의 상당한 원인이 될 수 있는 모종의 ‘원리’로 간주되는 것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이 어린 누이를 첩으로 보낸다는 것이 어떤 ‘복잡한 의미망’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인신매매에 준하는 그런 비윤리적인 행동을 현대라는 전혀 달라진 ‘때’의  맥락 안에서 재구성 한다는 것이 주역 읽기의 근본 목적 자체와 많이 어긋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대목을 다시 펼친 것은 <화정>이라는 TV드라마 때문이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정명공주라는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데 그녀를 두고 내린 ‘예언’이 드라마 초반의 중심 화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광해군의 보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영창대군의 존재가 아니라 정명공주의 존재라는 ‘예언의 진실’이 다루어지는 부분이었습니다. 정명공주는 역대 공주 중 가장 장수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후기 서인(西人) 정권의 장기 집권에 크게 기여한 상징성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저도 이번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서인들은 욕도 많이 먹지만 그래도 원칙을 많이 지킨 정파였습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끝까지 막지 않았습니다. 이 드라마에 따르면, 광해군과 함께 무리하게 국면 전환을 주도한 대북(大北) 정권은 이 어린 소녀(정명공주)를 제거하지 못한 실수로 끝내는 멸문지화를 입게 됩니다. 어쨌든, 어제 본 <화정>의 내용은 주역 귀매괘의 스토리텔링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작가가 이 대목을 참조했든 안 했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창덕궁의 인정전 보위 위에다 뿔과 꼬리를 자른 양의 사체를 매달아놓은 사건이 발생한 것도 그렇습니다(‘羊’의 뿔과 꼬리를 자르면 ‘王’이 됩니다). 그 사건의 모티프가 될 만한 화소를 지닌 주역의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귀매괘 상육(上六)의 효사입니다.     


“상육(上六)은 여자가 광주리를 이는데 내용이 없느니라. 남자가 양을 찔러서 피가 없으니 이로운 바가 없느니라. -- 양(羊)은 삼효를 이른다. 괘가 끝나는 데 처해서 우러러 받들어 이를 바 없고 아래로는 응함이 없으니 여자가 되어 명을 받든다면 광주리가 비어(虛)서 주지를 못하고, 남자로서 명을 내린다면 양을 찔러도 피가 없으니 양을 찔러 피가 없음은 명한 바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건 물러서건 (아무도) 함께 하지 않으므로 ‘무유리(无攸利)’라 하였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415~416쪽]     


<화정>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은 두 여자, 상궁 개시와 정명공주입니다. 궁의 남자들, 광해군과 이이첨, 이덕형과 강주선 등은 그저 그들의 보조 인물에 불과했습니다. ‘명을 받든 여자들’의 한 판 승부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물론 주역의 말씀대로 모든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한 여자는 나이가 들었고 다른 여자는 나이가 어렸습니다. 나이 든 여자 상궁 김개시는 아버지와 아들을 이어서 섬기는 지하대적(地下大賊), ‘귀매(鬼妹)’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고 예언의 주인공으로 밝혀지는 정명공주는 암흑의 세계에 광명을 전달하는 젊은 영웅, ‘귀매(貴妹)’의 이미지를 보였습니다(극중 예언에서는 암흑을 밝힐 미래의 영웅을 ‘불을 지배하는 자’로 칭합니다). 위세가 등등하지만 개시가 인 광주리는 비어 있고(진짜 ‘불’인 정명을 놓치고), 광해군 앞에 놓인 선혈이 낭자한 양의 사체에서는 이제 더 이상 찔러도 피가 나지 않습니다(부왕과 형제까지 죽여서 얻은 왕좌를 조만간 잃을 운명입니다).     


요즘 들어서 젊은 사람들의 힘찬 모습들이 자주 좋게 보입니다. TV에 등장하는 젊은 정치가들도 보기가 좋고, 검도 합동 연무 때 만나는 4,50대의 사범들도 보기가 좋습니다. 최근에는 “오십은 나이도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제자든, 동료든 아직은 청년이니 공연히 나이 들었다고 주눅 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좋은 때이니 열심히, 재미있게, 의욕적으로 매사에 임해주기를 당부하는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제 나이도 생각합니다. 어디 가서 노인이라는 말을 들어도 전혀 섭섭한 나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이를 잊고 오직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일단 몸부터 만들기로 작정한지가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조금씩 성과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정도만 하고 마쳐야겠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지금 저의 머릿속에서는 아주 재미있고 흉흉한 참언들이 한 두 개씩 출몰하는 중입니다. 그것들로 한평생 제가 이고 다닌 ‘빈 광주리’를 다시 어지럽히다가는, 귀매괘의 경문처럼, ‘가면 흉하니 이로울 바가 없’을 것만 같습니다. 식구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조용히 집을 나서서 새벽 산책이나 해야겠습니다. 뇌택귀매(雷澤歸妹), 귀매(歸妹)!, 귀매(貴妹)!, 귀매(鬼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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