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Apr 29. 2019

사랑에 눈이 멀어

동방불패의 사랑

사랑에 눈이 멀어 

   

옛날에는 “사랑에 눈이 멀었다.”라는 말의 참뜻을 몰랐습니다. 나이 드니 그게 어떤 일인지 좀 알겠습니다. 일전에 <남자는 얼굴을 보고 여자는 옷을 본다>라는 제목으로 영화 『동방불패』(1991)의 몇 장면을 풀어본 적이 있었습니다만 오늘도 부득이하게 그 영화를 가지고 몇 말씀 드려볼까 합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동방불패(임청하)의 남녀추니(hermaphrodite, 남성과 여성이 동시에 존재함)적 성격과 자태가 오늘의 주제를 전경화 하는데 크게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그 영화를 청장년기 때 보신 분들에게는 특히 더 그런 효과가 날 것으로 기대됩니다.      


영화 『동방불패』를 보다 보면 풀리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합니다. 다름 아닌, “영호충(이연걸)은 과연 동방불패(임청하)의 정체를 몰랐을까?”라는 의문입니다. 영화는 시치미 뚝 떼고 시종일관, “영호충은 그가 만난 이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왜색풍의 여인이 동방불패라는 것을 종내 몰랐습니다. 그가 그녀(그)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은 최후의 결전이 이루어지는 묘족의 요새에서였습니다”라고 강변합니다. 그걸 부정하면 영화의 스토리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관객인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막된’ 주장에 반신반의하면서 동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내심으로는 내내 찝찝했습니다. 영화의 서사구조 상, ‘적과의 동침’을 합리화하는 수단이기도 하고(무지의 소산), ‘사제들의 죽음을 방조한’ 범죄의 혐의를 부정하는 알리바이(의지의 부재) 구실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호충이 동방불패의 정체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은 절대로 인정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정말 영호충은 동방불패의 정체를 몰랐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영호충의 혐의는 딱 하나입니다. 그는 알고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랑에 눈 먼 자였다.”라는 겁니다. 작가(감독)는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몇 가지 ‘줄타기’를 주인공들에게 강요합니다. 서로를 모른 채(주변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실인데) 서로에게 ‘위험한 불장난’을 하도록 합니다. 심지어 동방불패는 자신의 몸을 대신(代身)하도록 애첩 시시를 강박해서 결국 그녀가 영호충과의 하룻밤을 보내고 끝내 자진하게 만듭니다. 영호충은 시시의 몸을 동방불패로 상상(오인)하며 빠져들고, 시시는 영호충의 몸을 동방불패의 그것으로 상상(자기파괴)하며 ‘죽음까지 파고드는 에로티즘’을 구현하고(이제 시시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연인은 여자가 된 상태입니다), 그들의 정사(情事)를 환희와 질투 속에서 바라보던 동방불패는 밖으로 나가 무참한 살상(殺傷)을 저지릅니다. 그 부분은 여러 사람의 목숨과 관련이 된, 영호충과 동방불패가 벌인 가장 위험한 곡예였습니다. ‘줄타기’란 무엇입니까? 오직 떨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곡예가 아닙니까? 영호충과 동방불패의 ‘줄타기’는 그들이 절대로 서로를 위해(危害)할 수 없다는 믿음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거지요. 그들은 서로를 알고 만난 것입니다.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그들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본 사이입니다. 그들이 서로를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천보를 양보해도, 적어도 그들은 무의식적 차원에서에서라도 서로를 알고 있었습니다. 무의식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사랑에 눈 먼 자들’이었으므로 모든 지각(知覺)과 판단을 일시 정지 시켜놓았던 것입니다. 그것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후의 결전’에서 화장을 하고 여장(女裝)을 한 동방불패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영호충의 태도는 상황논리 상 ‘정지된 판단’을 다시 가동시키겠다는 의사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그는 거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직 사제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만을 생각한다.”라고요. 너와의 ‘눈 먼 사랑’은 이제 거두겠다는 것이지요. 사랑이 식었을 때, ‘사랑에 눈 먼’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남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집안(가문)을 생각하고, 부모들의 기대를 생각하고, 자신의 장래를 생각해서,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질 수밖에 없다며 냉철하게 계산한 뒤에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물론, 무슨 말로 호도하든 ‘판단 재가동’의 원인은 단 하나뿐입니다. 사랑의 열정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열정으로 눈멀어 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들이 갑자기 ‘죽고 사는’ 문제로 대두됩니다. 영호충의 말이 딱 그렇습니다. 의리 없는 것들, 욕정을 채운 남자들의 흔한 소행이지요.     


그러나, 동방불패는 영호충의 ‘사제들의 죽음’ 운운에 콧방귀를 뀝니다. 진짜 주제가 그것이 아니라는 걸 그(그녀)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도 원래 한 인물 하던 ‘남자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호충의 배신을 그의 주변에 있는 나이 어린 ‘여자들’ 때문이라고 단정합니다. 자기를 능가하는 대체재가 있기 때문에 남자가 헛말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여자들부터 죽이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질투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만, 동방불패의 작심(作心)은 죽음을 불사하는 것이어서 일반적인 질투의 수준을 훨씬 상회합니다. 영호충의 여자 중 하나인 임영영의 아버지 임아행은 벌써부터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악인이지만 노현자(老賢者)의 풍모를 지닌 자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눈 감고도 알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절세의 무공을 담고 있는 규화보전을 손에 넣고도 “거세를 해야 규화보전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일장 일절을 읽고는 주저 없이 그것을 불에 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방불패의 질투심에 때맞추어 불을 지릅니다. “네가 여자가 되어서 그와 연인관계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너는 세 번째에 불과하다.”라고 약을 올립니다. 젊고 예쁜 내 딸이 퍼스트고 오래된 연인인 스승 악불군의 딸이 두 번째고, 분수 모르고 성전환증을 앓고 있는 늙은 너는 고작해야 세 번째에 불과하다라는 겁니다. 그 말에 동방불패는 이성을 잃습니다. 평정심을 잃게 하는 것은 불패의 강적을 이기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결국 끝까지 ‘사랑에 눈먼 자’였던 동방불패는 승리를 목전에 두고 스스로 자멸(自滅)합니다. 

    

영화 『동방불패』가 ‘사랑에 눈먼 자들’에 관한 영화였다면, 그래서 주인공이 동방불패였다면, 동방불패는 민족(묘족)의 승리 대신에 자신(사랑)의 승리를 취한 ‘승리하는 인간’이 됩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보여준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한 가닥 양심은 남았었는지, 영호충도 그렇게 사랑하는 남자의 ‘환상 속의 그대’로 남으려는 동방불패에게 마지막 성의를 표합니다. 사랑의 줄타기를 시연합니다. 치명상을 입고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그녀에게 몸을 던져 그녀를 부여잡은 채 “그날 밤의 여자가 당신이 아니었다고 말해 달라.”고 조릅니다. 당연히 동방불패는 거절합니다. 계속 ‘사랑에 눈멀어 있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자기를 버린 남자가 죄의식으로 평생토록 고통 받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동방불패는 마지막까지 ‘사랑에 눈먼’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자는 살리고 자기는 죽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집안 일로 ‘영호충’을 부르는 사람이 있군요. 우리집 동방불패는 여태 ‘사랑에 눈먼’ 영호충을 막무가내로 호출합니다. 제가 무엇을 하고 있든 관계 하지 않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불러내서 이것저것 시킵니다. 자신에 대한 모든 지각과 판단을 정지시키고 “나 같은 마누라 없었으면 너는 벌써 쪽박 찼다.”라는 규화보전의 절대무공 비결만 외우라고 강요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겉으로는 그냥 웃어넘깁니다만, 속으로는 한 번씩 의심을 합니다. “너무 오래 사랑에 눈 먼 자의 행색을 보여온 것은 아닌가?“라고요. 너무 방심할 일은 아니지 싶은데 아직도 우리집 동방불패는 기고만장하기만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젊은 여자가 귀하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