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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pr 30. 2019

햇닭을 구해 인삼을 가득 넣고

문학이란 무엇인가?

햇닭을 구해 인삼을 가득 넣고     


절망(絶望)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는 상태야말로 인생의 블랙홀이다. 모든 것이 다 빨려 들어가 버린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앞에 두고서도 때로는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사람이 말을 하는 까닭을 ①득을 보려고, ②욕을 하려고, ③장난삼아서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남을 칭찬하거나 위로하는 것, 질문을 하거나 토를 다는 것, 기도를 하거나 염불을 하는 것들도 다 그 세 가지 목적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나는 하나 더 첨가시키고 싶다. ④할 말이 없어서가 그것이다. 

할 말이 없지만 무언가 꼭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안 하면 더 큰 결례가 될 때 우리는 말을 한다. ‘현실성’하고는 애초부터 동떨어진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     

 

...희곡은 연극이 아닙니다. 연극에는 얼굴이 있고, 목소리가 있고, 몸짓이 있고, 의상이 있고, 그래서 색깔과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희곡에는 말이 있고, 그 밖의 것은 ‘없어도’ 좋습니다. 아니 없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희곡이 연극으로 태어날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연출은 그래서 산모입니다. [중략] 그래서 그랬는지 저는 희곡이 가지는 대사의 ‘현실성’에 대한 갑작스러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까맣게 잊었던 옛날 일이 생각났습니다.

끼니를 잇지 못하는 참혹한 시절에 겪는 ‘어머니의 병환’은 자식들에게 절망을 안겨줍니다. 그것을 ‘절망’ 이외에 달리 묘사할 언어가 제게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때 마음씨 좋고 점잖은 어떤 어른이 제게 진지하게 말씀하시던 것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병환은 ‘너무 원기를 잃어 생긴 것이니까 햇닭을 구해 인삼을 가득 넣고 푹 과서 잡수시도록 하라’는 부탁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 어른의 착함과 옳음과 진지함을 모르지 않습니다. 제게 관한 사랑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햄릿』을 다시 읽으며 그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 어른의 말씀을 ‘아포리즘’의 범주 안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에 담긴 마디마디 귀한 말들을 읽으면서 그 어른의 말씀을 떠올릴 만큼 그 둘 사이의 연계를 끊어버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대사들이 너무 현학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참으로 현학적이라면 저는 아예 너무 ‘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아니면 ‘사치스럽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더 나아가 조금은 ‘무모하다’고 말해 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정진홍, 『고전, 끝나지 않은 울림』]   

  

위의 대목은 ‘말’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는 그저 ‘말뿐인 말’이 결국 희곡의 대사이고, 아포리즘이고, 문학이다라고 필자는 말하고 있다. 그 말을 알아듣기 쉽게 하려고, 어릴 때 내 마음에 상처를 안겼던 ‘마음씨 좋고 점잖은 어떤 어른의 부탁 말씀’을 인용한다. 끼니 마련조차 어려운 집에 와서 병들어 누운 어머니에게 “햇닭을 구해 인삼을 가득 넣고 푹 과서 잡수시도록 하라.”고 말씀만 그저 던지고 가는 저의가 무엇인지 ‘어린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희롱인가, 고문인가, 연극인가, 그런 생각만 들 뿐이다. 나이가 들어, 이제 스스로도 ‘마음씨 좋고 점잖은 한 어른’이 되어, 세상의 모든 아포리즘이 결국 그 어른의 말씀과 하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포리즘(aphorism)이란 무엇인가, 그럴 듯하게 말해지는 진리의 명제란 무엇인가, 그 말로 우리의 현실이 달라질 일이 어디에 있는가, 말로써만 구해지는 햇닭과 인삼은 어디에도 없다. 거기서부터, 『햄릿』에 등장하는 그 숱한 아포리즘, 그 말들의 유희에서 한 걸음 비켜서는 침잠(沈潛)의 독법이 설명된다. 침묵의 독서를 필자는 강조한다. 아직 ‘침잠’에 관해서는 본격적인 언급이 되고 있지 않지만 위의 인용문 다음 대목에서 그런 내용들이 설파되고 있다.

“말은 말뿐일 뿐이다.” 그거 하나 알려고 평생을 책과 씨름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저 말일 뿐인 것을 두고 이 말 저 말, 말이 많았다. 『햄릿』에 등장하는 그 많은 말들, 그 많은 아포리즘들의 효용은 고작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라는 가르침이었다. 독후감(독서론)의 마지막 단계, 역설과 부정의 ‘해체 작업’이 본격적으로 수행되는 부분에서 정진홍 선생은 그렇게 말한다. 텍스트는 비어 있다. 그것은 ‘끼니를 잇지 못하는 참혹한’ 사정(事情)에다 “햇닭을 구해 인삼을 가득 넣고 푹 과서 잡수시도록 하라.”는 ‘부탁 말씀’을 던지는 것과 같이 그냥 ‘끔찍하게’ 던져진 것이다. 그것에 실망할 까닭도, 그것에 의지할 하등의 연유도 없다. 그것에 일희일비할 어떤 근거도 없다. 그것은 본디 ‘사치스럽고, 무모한’ 것이다. ‘역설’이다. 고작 역설인 것, 그것이 바로 ‘말’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투사라면, 『햄릿』을 다시 꺼내 읽은 것이 내 지난 상처에 대한 위로였다면, 그것 역시 비어 있는 텍스트에 내가 무모하게 무엇인가를 비벼 넣은 것이다. 그토록 나를 황홀하게 했던 세상의 모든 문학들, 모든 아포리즘들은 고작 그런 ‘할 말이 없어서’ 한 말들일 뿐이었다.     


사족 한 마디. 선생이 『햄릿』을 해체하고 그 빈 ‘구멍(hole)’에서 무엇을 보고자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말을 버리고 얻는 경지를 말로 유추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지도 모른다. 본디 주문(呪文)은 풀이하지 않는 법, 다만 ‘번뇌가 많으면 그 리듬이 거칠고, 번뇌가 적으면 그 리듬이 유연한’ 일종의 ‘생명에 따른 영원한 리듬’에 선생이 관심하고 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여하간, 선생의 그 ‘구멍’은 어둡고 비어 있고 끝을 알 수 없으며, 이미 무엇인가를 성체(成體)로 산출(産出)한 뒤의 공허일 수도 있고, 만물이 생장(生長) 혹은 생장(生葬)되는 블랙홀일 수도 있고, ‘노자의 암컷’일 수도 있을 거라는 추측만 해 본다. 선생은 『햄릿』의 ‘독백 과잉’을 ‘아포리즘 과잉’에다 연결짓는다.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들이 자신의 ‘구멍’을 위협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 선생은 삼독 끝에 초독과 재독의 『햄릿』텍스트를 완전히 해체한다. 이를테면 모든 ‘복수의 존재론’의 소멸을 공표한다. 그리고 ‘연극이 끝났다’라고 말한다. 말의 성찬, 문학은 그저 문학일 뿐 현실의 유추나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복수의 존재론’을 부정하는 것은 ‘햄릿’의 말이면서 동시에 선생의 말이기도 하다. 이제 ‘부정의 미학’은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쏟아낸 뒤의 공허와 어둠은 『햄릿』의 시학이면서 동시에 선생의 시학이다. 그것은 이미 ‘복수극(자기 이해)’을 넘어서려는 주체의 형성적 의지에 도달되어 있다. 그 ‘형성적 의지’가 앞서 말한 ‘생명에 따른 영원한 리듬’에 일체감을 느끼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지상의 이념에 종속되는 속류(俗流) 종교학인지(선생은 종교학자다), 절대 하수인 나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선생이 어떤 경로로 그곳에 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선생이 그곳에 높이 앉아있다는 것만 알겠다.     


* 공적 의미의 확정도 아니고, 상처의 치유도 아니라면, 과연 독서는 나에게 무엇인가? 세상 읽기의 시작과 끝은 어디이며, 내 로코보코는 과연 무엇인가, 밀려드는 환난에 맞서 그 질문에 답하려고 고투하다가 내 원기가 다 떨어졌던 것 같다. 지친 몸으로, ‘바게쓰’ 생각을 한 것도 아마 그 까닭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였을까? 선생 또한, 끼니 걱정이 산더미인 내 빈궁한 집구석에 오셔서 “너무 원기를 잃어 생긴 것이니까 햇닭을 구해 인삼을 가득 넣고 푹 과서 잡수시도록 하라.”는 빈 말씀만 한 마디 던지고 그냥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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