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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01. 2019

봉화대가 있는 풍경

봉화대가 있는 풍경    


글쓰기 책을 쓰기 시작한지 석 달이 흘렀다. 마지막 퇴고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 줄 한 줄 더하고 빼는 작업이 생각보다 재미있다. 한 번 읽고 버리는 책이 아니라 오래 지니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었다. 인생의 교과서가 될 수 있는 책을 넘본다면 지나친 과욕일까? 어쨌든 그런 마음으로 초고의 한 단어 한 문장을 그냥 넘기지 않고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본문뿐만 아니라 예시문으로 사용되는 전작(前作)들도 다시 다듬고 있는데 드물지 않게 “왜 이런 거친 문장을 그대로 내보냈을까?”라는 반성이 들곤 한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며칠을 보내는 중이다. 상반기 중에는 얇은 책 한 권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의 교과서’ 운운 하며 분수 모르는 소리를 했지만, 우리 세대는 ‘교과서’가 제 구실을 못하는 ‘막히고 굽고 어두운’ 세상에서 오래 살아 왔다. 그래서 그런지 ‘교과서적으로 사는 삶’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대체로 이중적이다. 모범적이긴 하나 사회성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뜻은 좋은데 현실성이 없다, 말은 맞지만 세상이 어디 말대로 되는가. 맑은 물이 깨끗하고 좋지만 그런 곳에서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대개가 그런 식의 이중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 우리 사회의 오래된 고질이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오래된 ‘오해와 편견’, 혹은 깊게 스며든 ‘못난이 콤플렉스’를 발본색원해야 될 역사적 전환점에 놓여 있다. 교과서에 적힌 대로 사는 삶이 인정받고 존경받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서 있다. 작금의 정치판을 보면 그 모든 오래된 역사의 상처들이 최후의 몸부림을 하고 있는 시국인 것 같다. 낡은 시대의 ‘코드와 맥락’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 ‘아집과 분탕질’로 퇴행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작태가 결국은 스스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신세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해서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당대의 인생들에게는 지루하고 고통스런 여정일지도 모르나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보면 거의 한 순간에 일어나는 일대 역사적 반전일 것이다.    

 

가끔, 학생들에게 묻는다. ‘공주의 남자’에서 ‘공주’가 중요하냐, ‘남자’가 중요하냐? 그러면  대개 ‘남자요!’라는 목소리가 훨씬 크게 들린다. 이어서 ‘무사 백동수는?’하고 물으면 ‘백동수요!’라고 답하고, ‘제빵왕 김탁구는?’하고 물으면 당근 ‘김탁구요!’라는 반응이 압도적이다. 질문의 저의는 모른 채 드러난 ‘질문의 리듬’만을 파악하고는 점입가경, 질문이 반복될수록 아주 신이 나서 그렇게 답한다. 질문을 던진 자로서는 이제 그 신나는 기대를 깨는 순서가 남았다. 두 단어가 합쳐서 하나의 의미를 형성하는 관계에서는 언제나 앞말의 의미가 중요한 법이라고 엄숙하게 말한다. 공주가 중요하고 무사가 중요하며 제빵왕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게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포정(庖丁)’이야기를 꺼낸다. ‘포정’은 ‘주방장 정씨’라는 뜻이라는 것, 장자가 이른바 ‘양생(養生)의 도(道)’를 가르치려고 만든 이야기인데 그 주인공의 이름까지는 알 필요가 없어서 성만 붙였다는 것, 물론 옛날의 언어 관습이 그러한 것이기도 했지만, 행여 ‘포박(庖朴)’이라 한들 뭐가 달라지겠느냐는 것 등을 이야기 한다. 백동수든 김탁구든 그들이 진정한 무사였고 제빵사였다는 것이, 그래서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 하나의 교과서가 된다는 것이 중요하지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설득한다. 그러면 나의 순진한 학생들은 이내 정색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포정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칼의 표상(실제로 일본에서 알아주는 칼의 상표가 ‘포정’이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인생을 한 번 살아보기 위한 바람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그의 소 잡는 경지는 최고의 음악에 비견된다. 비굴하게 조아리며 하루 세 끼 밥 빌어먹기에 급급하고, 날마다 쭈구리고 앉아서 더러운 똥 싸기에 여념이 없는 인간, 그 비루하기 짝이 없는 역사와 냄새나는 실존을 단숨에 뛰어넘어, 비굴도 악취도 없이 그냥 한 번 움직이기만 하면 그게 곧바로 최고의 음악이 되는 경지,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지만) 그게 바로 포정의 경지다. 장자가 말한 ‘양생의 도’라는 게 결국 그거다.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나는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교과서를 짓는다고 믿고 있다.     

사진 속의 정경은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일대다. 오래된 봉화대와 마을의 소담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오름이 인상적이다. 내가 태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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