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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02. 2019

풍경이 선생이다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풍경이 선생이다   

  

저는 요즘 닭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금년 초 자주 시켜 먹던 닭튀김을 먹고 체해서 크게 한 번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 하고 있는 인간의 몸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일주일 동안 속속들이 체험했습니다. 배(위장)와 머리(뇌)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이번에 확실히 알았습니다. 꼭 닭고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도 없었습니다만(가정 주치의 선생님은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한 신체 기능 저하 탓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로 닭고기 먹는 일은 제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시킬 때마다 한 장씩 얻는 쿠폰으로 두어 달 간격으로 공짜 닭도 한 번씩 타 먹는 집이었는데 가장의 ‘절계육(絶鷄肉)’ 선언으로 그런 재미도 다시는 맛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4개월 동안 집 아이의 간청으로 딱 한 번 시켜 먹었습니다). 개고기에 이어서 이제 닭고기도 제 식단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도 언젠가는 그런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로는 자주 가던 정육점(멀리 있는 곳이라 주로 제가 차를 가지고 갔습니다) 안으로 출입을 하지 않는 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좀 떨어진 곳에 차를 대놓고 있으면 아내가 혼자 들어가서 필요한 만큼 구입을 합니다. 언제부턴가 고기 비린내가 역겹기 시작했습니다. 의지로(?) 돌파하기에는 제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저 몸이 시키는 대로 순응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닭고기 안 먹게 된 사연을 말씀드리다 보니 ‘닭띠’와의 인연이 오랜만에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닭띠고 큰아이도 닭띠입니다. 저도 한 때는 닭띠를 자처했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막내아들 생년과 띠를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제 띠가 닭띠라고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집 나이와 학교 나이가 다른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출생 신고가 제대로 안 된 경우가 많았거든요. 학교에서 종종 집 나이를 조사하는 방편으로 띠를 물어보곤 했습니다. 그때면 저는 늘 닭띠에 손을 들었습니다. 제 나이보다 적게 호적에 오른 아이들을 조사하는 게 주 목적이었는데 저는 오히려 거꾸로 손을 든 거죠. 아마 그때는 띠가 나이를 뜻한다는 것조차 몰랐지 싶습니다. 어쨌거나 나중에 그것이 어이없는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한동안 그 ‘닭띠 콤플렉스’가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좀 미웠는데(그때는 아버지도 미웠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난 뒤부터는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닭띠에 대한 애정이 소록소록 쌓여갔습니다. 친구 중에 닭띠가 있으면 은근히 동병상련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제 곁에는 말띠, 양띠, 원숭이띠 친구들과 어금버금한 숫자로 닭띠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고로, 저희 학년 세대의 주류는 원숭이띠들입니다.


당연히 제 딸아이의 닭띠도 저는 사랑합니다. 그런데 한 번씩 피부 트러블을 겪는 딸을 두고 “닭띠라서 그렇나?”라고 말하는 아내를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개띠인 아내는 일품 피부를 타고났습니다(처음 밝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자기를 닮지 않고 저를 닮은 것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들은 다 그런가? 싶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옛날에 범띠 어머니가 닭띠 아버지를 두고 시도 때도 없이 타박하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집에 재물이 모이지 않는 것은 두 발로 모이를 헤쳐 대는 닭띠 아버지의 그 닭발짓 때문이라고요.     


제주도에 가서 우도를 한 번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말이 뛰어놀던(사실은 어슬렁거리던) 넓은 풀밭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때 까맣게 잊었던 기억 하나가 되살아났습니다. 제가 제주도에서 태어날 무렵의 저간 사정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는 살 길을 모색하겠다며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서울로 간 남편은 일 년이 지나도록 일자 소식도 없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어머니는 무작정 혼자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스물여덟 난 젊은 아낙이 어렵게 남편을 찾아서(“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라고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다시 제주도로 내려와 그 기념으로 낳은 것이 저였습니다. 아마 닭띠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했던 모양입니다. 그 사무친 닭띠 서방에 대한 원망이 재회의 소산인 막내아이를 닭띠 아들로 착각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밑도 끝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장소에 따라서, 그것이 주는 지배적 인상에 따라서 제 안에 있는 오래 묵은 것들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합니다. 『인간의 굴레에서』(서머싯 몸)라는 소설에서 어린 주인공이 ‘풍경’에 눈뜨는 장면이 있어 한 번 옮겨 봅니다. 풀밭과 대성당에 대한 묘사가 최근의 제 심사에 많이 방불했습니다(며칠 전 주변 나무들과 잘 어울리는 성당 풍경을 페이스북에 두어 장 올렸습니다).   

  

... 필립은 이제 한결 편해졌다. 공간이 넉넉지 않아 상급반 학생에게만 자습실이 배당되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는 큰 방에서 함께 지내면서, 식사도 다 함께 하고 하급생들하고도 되는대로 섞여 예습을 했었다. 필립은 그게 어쩐지 싫었던 참이었다. 남들과 같이 있으면 불안할 때가 많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그럴 때면 교외로 혼자 산책을 나갔다. 푸른 들판 사이를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강둑에는 가지를 친 나무들이 양쪽에 늘어서 있었는데 이 둑을 따라 거니노라면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피곤해지면 풀밭에 엎드려 피라미와 올챙이 떼가 재빠르게 헤엄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구내를 어슬렁거리며 거니는 것도 즐거웠다. 중앙의 풀밭에서는 여름철에 네트 연습을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보통 때는 조용했다. 이따금 학생들이 팔짱을 끼고 거닐거나, 공부벌레 아이가 멍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외워대며 천천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느릅나무 숲에는 당까마귀 떼가 살고 있어 사방에 온통 우울한 새 울음이 가득했다. 한쪽 편에는 대성당이 서 있는데 건물 가운데로 뾰족탑이 높이 솟아 있었다. 필립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대성당 건물을 바라볼 때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어떤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자습실을 배당받았을 때(빈민가가 내다보이는 네모진 작은 방으로, 네 명이 같이 사용했다), 필립은 대성당 풍경을 찍은 사진을 한 장 사다가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그러는 사이 사학년 교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창문 밖으로 손질이 잘된 오래된 잔디밭과 잎이 무성한 멋진 나무들이 보였다. 그걸 내다보고 있노라면, 아픔인지 기쁨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야릇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았다. 심미적 감정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서머싯 몸(송무), 『인간의 굴레에서』]     

사춘기에 접어든 필립은 자신의 내면을 채워갈 반성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혼자서 강둑을 거닐며 물속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학교 주변의 풀밭과 숲에도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출입하곤 합니다. 대성당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눈뜨기도 하고, 평화로운 정원 풍경에 넋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풍경이 심미적 체험을 선사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비로소 건강한 어른이 되는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 같습니다. 누구는 밤이 스승이라고 했습니다만 저는 풍경이 선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올 때 상처도 그리움이 됩니다. 간혹, ‘닭띠에 관한 몽상’ 같은 뜬금없는 ‘알쓸신잡’ 식 몽상도 떠오르기도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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