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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09. 2019

어머니의 나무

풍경과 상처

어머니의 나무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김훈, 『풍경과 상처』). 20년 전에는 풍경이 상처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볼 때마다 가슴 아픈 풍경들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그냥 상처였다. 그냥 아련하거나 그냥 어둑하거나 그냥 축축했다. 감각이 감정의 통로에는 진입할 수 있었으나 직관이나 사유의 영역에는 아예 접근할 수 없었다. 지금은 좀 이해가 된다. 언제부턴가 그렇다. 그 까닭도 이해가 된다. 조만간 내가 이 풍경들과 영원히 작별할 신세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다.

로렌 아이슬리가 그의 자서전 『그 모든 낯선 시간들』에서 쓰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몇몇 문장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 무렵이다. 상처의 그 지독한 속성을 엿볼 수 있었다. 

    

...내 어머니는 여든여섯에 죽었다. 내가 기억하는 생애 내내, 정신이상은 아니었다고 해도 신경과민이었던, 자신의 미적 감각을 한 평원 읍의 살롱 미술에 다 써버렸던, 그 여자가 죽었다. 그녀의 편집증적인 존재 전체가 내 어린 시절부터 내내 그녀 주변의 세계에 대한 고의적인 왜곡 및 수탈로 허비되었다.

내 두뇌를 가로지른,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내가 가로등 아래로 걷게 만들었던 상처가 있었다. 내가 들었던 임종의 아버지한테 그녀가 했던 말은 나로 하여금 언제나 한결같던 그녀 존재를 피하기 위해 대륙 바깥 둘레를 맴돌게 만들었다. [중략]

몇 년 동안 나는 그 폭력의 임종 장면으로, 위엄은커녕 짐승의 자제력도 없는 그 장면으로 다시 끌려가기를 기대했었다. 결국 일은 다른 식으로 벌어졌다. 어머니가, 17세기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 그리고 그 안에 그녀 자신의 성이 안치되어 있는 마녀들처럼 마침내 보였는데, 마지막으로 읍을 옮긴 거였다. 그녀는 폭력과 불화의 중심이고 그 파문이 여전히 끝없이, 심지어 살아생전 그녀를 결코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 속에서조차 퍼지는 중이었으나, 잠을 자다 평화롭게 죽은 터였다. 폭풍의 눈이 지나간 것이었다. [로렌 아이슬리(김정환), 『그 모든 낯선 시간들』]     


로렌 아이슬리의 어머니 혐오는 상처에서 연유한다. 그는 죽어서조차 그녀 근처에 묻히기를 거부한다. 어머니의 삶을 용서는 하지만 함께 하기는 싫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상처는 죽어서도 아물지 않는 것이었다.      

내 연구실이 소재한 인문사회관 앞의 모과나무가 요 몇 년 사이에 그 풍채가 놀랍도록 좋아졌다. 예전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모과나무가 다 그렇듯이 가지와 줄기가 굵기가 없고 힘 있게 뻗어나가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행색이었는데 근자에 와서 그 기세가 날로 일기당천(一騎當千),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볼 만한 풍경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무에 얽힌 어머니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글쓰기가 숙명으로 찾아온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교내 백일장에 아무 생각 없이 써낸 「필통」이란 산문이 가작(佳作)으로 뽑혔다. 필통 안에서 일어나는, 연필과 지우개와 칼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동화다. 그 덕에 『수정(水晶)』이라는 이름의, 꽤나 전통 있는 교지에 작품이 실렸다(100년이 넘은 학교다). 글쓰기로 맛본 최초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 영광도 잠시, 호사다마(好事多魔), 평생 잊지 못할 가시밭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니, 학교가 내게 안긴 최초의 상처라고 할 수 있겠다. 글짓기 대표선수로 뽑혀 매일같이 황금 같은 방과후를 호랑이 선생님 앞에서 글짓기 연습으로 보내야만 했다. 한 마디로 ‘아주 그냥 죽여줘요’였다. 다른 아이들이 뛰어노는 시간에 한두 시간씩 꼼짝없이 책상 앞에 묶여있어야 하는 것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매일 다른 이야기를 써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고역이었다. 언필칭 ‘프로’가 된 지금도 힘든 일인데, 초등학교 2학년짜리 어린아이가 어떻게 매일같이 다른 이야기를 써낸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어쨌든 피 말리는 고역을 몇 달 무사히 치러내고 드디어 출전 길에 나섰다. 시내의 한 대학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였다. 한 학년에서 한 명씩 뽑혀나갔는데 형도 함께 출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는 원래 산문부였는데 출전 당일 날 운문부로 전격적으로 이적(移籍)되고 만 것이다. 선생님 말씀인즉슨 날이 갈수록 내 글이 짧아지는 게 필시 운문 적성인 것 같다는 거였다. 아마 운문 산문 짝을 맞추다 보니 최저학년이었던 내가 그렇게 밀린 것 같았다. 어머니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감독 선생님이 칠판에다 시제를 게시했다. 고구마, 달밤, 전봇대... 그런 거였지 싶다. 어느 것 하나를 골라 시를 쓰라는 거였다. 갑자기 막막했다. 늘 자유과제로 쓰고 싶은 글만 쓰다가 갑자기 지정과제로, 그것도 운문으로 쓰려니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제로 나온 단어들을 이리저리 엮어서 얼른 한 편 써내곤 교실을 나와 버렸다. 교실 밖 모과나무 옆에서 서성이던 어머니가 그런 나를 보고 물었다. “조근놈, 아직 교실 못 찾았니?”


결과는 당연히 참담했다. 형은 그나마 3등을 해서 대학 마크가 새겨진 동메달(뺏지)과 함께 듬뿍 부상(副賞)까지 받았다. 나는 그냥 영광에 들뜬 형의 그림자만 밟고 서 있었다. 어머니는 그때 그냥 내 머리만 한 번 쓰다듬고 말았다. 그때 받은 상처도 컸지 싶다. 얼마 전, 어머니가 의지 삼고 서성이던 그 모과나무에서 잘 익은 모과 열매 두 개를 따왔다. 거실 장식장 위에 올려놓고 오며가며 냄새도 맡고 한 번씩 쓰다듬기도 한다. 크기도 크고 잘 생기기도 했다. 생기기도 잘 했지만, 고는 속도도 아주 더디다(방안 공기가 너무 차가운가?). 나는 매년 그 모과를 탐낸다. 누구도 그걸 막거나 흠잡지 않는다. 지금 내 연구실이 바로 그때 그 교실 자리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조근놈, 아직 교실 못 찾았니?”라고 내게 묻던 그 자리가 지금 내 연구실이 있는 자리다. 층수만 4층으로 올라왔을 뿐이다. 이번에도 경비 주임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큰놈으로 두 개 골랐다. 모과나무는 여전히 그 모과나무다. 그 앞을 지나, 나는 매일같이 그때 그 교실 문 앞을 들락거린다. 그래서 가끔씩 어머니 목소리도 거기서 듣는다. “조근놈, 아직 교실 못 찾았니?”     


어머니가 지금도 살아계셨다면 한 번 모시고 와서 그 ‘모과나무 아래의 추억’을 되새기며 회포를 함께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머니는 그 후 5년 뒤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그래서 내겐 사춘기 이후에 축적된 ‘어머니의 아들’로서의 기억이 전무(全無)하다. 이제는 어머니와의 그 10년 남짓한 추억마저 가물가물, 몇 장면 남아있지 않다. 그저 아쉬울 뿐이다. 로렌 아이슬리의 어머니라도 좋으니 여든 여섯까지는 사셨더라면 좋았을 것이다(1926년생이시니 올해 아흔 셋이시다). 

“우리는 대지를 사랑했으나 머물 수 없었다.”(로렌 아이슬리의 묘비명).

사진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어머니의 나무, 내 연구실 앞의 울창한 모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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