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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10. 2019

붉은 까마귀

스승과 제자

붉은 까마귀, 스승과 제자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남 가르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살아왔지만 아직도 그 물음에 명쾌한 답을 낼 수가 없다. 그만큼 남을 가르친다는 게 어려운 일이다. 하나는 말할 수 있다. 가르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은 변한다는 것이다. 내게 배우는 학생들도 볼 때마다 다르다. 같은 사람이 달라지기도 하고 학기마다 다른 학생들을 만나기도 한다. 10년 이상 스승과 제자로 동고동락하다 보면 교학상장(敎學相長)을 절로 느끼게 된다. 요즘 대학생들은 옛날과 달리 산만하고 예의가 없다. 수업 중에도 제멋대로 들락날락한다. 만나는 교수들마다 이구동성으로 한 해 한 해가 다르다고 말한다. 점점 수업태도가 나빠진다는 것이다. 학년별로도 차이가 많이 난다. 4학년쯤 되면 좀 점잖아지기도 한다. 다행히 내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금년이 오히려 덜하다. 그것도 볼불복인 모양이다.

어쨌든 사람은 누구나 바뀌게 마련이다. 교육의 주체와 대상이 세월과 함께 변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결국 교육관과 교육방법도 때에 따라서, 때에 맞는, 변화를 요구받을 수밖에 없다. 어제의 교육관이 오늘도 유효하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가르치는 일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는 늘 생각의 말미를 놓지 않아야 할 것 같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이를테면 ‘자유방임형’ 교육관과 마주치는 일이 있다. 이론은 구구각색, 여러 가지이지만 요점은 ‘자유방임’ 그것 하나인 경우가 많다. 학생들이 무엇을 하든 교사는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될 놈은 가만두어도 되게 되어 있고, 안될 놈은 아무리 닦달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과지식이나 적당히 알아듣게 설명해주고(터득은 물론 학생 몫이다) 생활지도 같은 것은 아예 할 생각을 말자는 것이다. 울창한 느티나무의 일생이 작은 도토리 씨앗에 다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인간은 이미 자신의 일생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설계도가 이미 다 그려져 있다는 식이다. 교사는 그 ‘청사진’이 햇빛에 잘 노출되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나는 교육학자가 아니라서 그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른다. 그러나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학교에서 40년 가까이 생활하다보니 그건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다. 듣기에 그럴싸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정말이지 ‘이야기’에 그치는 교육관이다. 아니, 교육관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궤변이다. 예술이나 여타의 기예 교육에서 요구하는 도제식 교육은 물론이고 성기성물(成己成物)을 추구하는 인문교육의 목적에도 전혀 부합될 수 없는 낭설이다. 스승의 몸에서 제자의 몸으로, 스승의 영혼에서 제자의 영혼으로 무엇 하나 건너갈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교육’이 왜 필요한가? 그렇게 편하게 학생을 가르칠 수 있다면 옛날부터 훈장 똥은 왜 개들도 먹지 않았겠는가?     

 

무엇이든 나에게 유리하고 내 배짱에 맞는 것이 좋아 보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런 주관적인 요소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르치는 자들이 취해야 할 우선적인 덕목일 것이다.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스승을 찾아 헤매는 여행을 멈추지 않는 자라야 비로소 남의 자식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교육관과 교육방법에 좋은 시사점을 던지는 고사를 하나 인용한다. 언젠가 글쓰기 공부 때에도 한 번 소개했다. 연암의 ‘붉은 까마귀(赤烏)’ 이야기다. 스승은 알고 제자는 모른다. 스승이 ‘붉은 까마귀’를 일깨우지 않았다면 제자는 평생을 모르고 살다 가거나, 아니면 인생 말년에 가서야 겨우 그 이치를 터득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른다(내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제자는 스승의 도움으로 약관의 나이에 그 이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교육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설흔. 박연찬)라는 책에서 인용한다.   

  

...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빛이 번지는가 싶더니 다시 석록(石綠)빛이 번지기도 하고,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눈에 어른거리다가 다시 비취색으로 빛난다. 그렇다면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테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터이다. 그 새는 본래 제 빛깔을 정하지 않았거늘, 내가 눈으로 보고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 않고 먼저 마음으로 정한 것이다.

아, 까마귀를 검다고 단정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또다시 까마귀로써 천하의 모든 색을 한정 지으려 하는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검은빛 안에 이른바 푸른빛과 붉은 빛이 다 들어 있는 줄을 누가 알겠는가.[『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스승(연암)으로부터 ‘붉은 까마귀(赤烏)’에 대해서 답안을 제출하라는 문제를 받고 전전긍긍하던 제자가, 막다른 길에서, 우연히 찾아온 정서적 충격에 힘입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획득한다. 위의 인용은 그 순간에 대한 묘사다. 눈앞에 나타난 묘령의 여인에게 온 마음을 빼앗겨 일순 심리적 공황상태(모든 편견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를 겪으면서 인식의 ‘색안경’을 벗는다는 이야기다. 약관의 제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를 대면하는 순간 그토록 찾아 헤매던 붉은 까마귀가 그녀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모습을 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정신이 갑자기 몽롱해 지며, 얼굴이 불 같이 뜨거워지는 순간, 제자는 문득 모든 선입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하늘을 나는 까마귀는 검은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현란한 빛의 총합이 본디 검은 색인 법, 마음 속의 검은 까마귀에 사로잡혀 눈앞의 붉은 까마귀를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스승은 제자의 깨우침을 격려하고 그 의미를 가르친다.  

   

“네가 스스로 약(約)과 오(悟)의 이치를 깨달았구나.”

“네?”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는 거리를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네가 이리저리 걸으며 까마귀를 본 것이 그 방법이었다. 그럴 때 비로소 문제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을 일컬어 약의 이치라고 하느니라.”

“네.”

“문제를 인식하고 나면 언젠가는 문제의 본질을 깨닫는 통찰의 순간이 오는 법. 네가 갑자기 깨달았다고 한 그 순간이니라. 통찰은 결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반드시 넓게 보고 깊게 파헤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을 일컬어 오의 이치라고 하느니라.”[『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로 사물을 설명한다. ‘붉은 까마귀’라는 말을 모르고 있던 제자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말로 그것을 설명하라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면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말을 다 버리고 새로운 말을 배워야 한다. 자신이 아는 것에 집착하던 제자가 정신을 잃을 정도의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을 때야 비로소 ‘붉은 까마귀’를 본다는 것은 바로 그 ‘버리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싸구려 옷을 벗고 고급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때는 주저 말고 지금 걸치고 있는 것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게 스승의 가르침이었다.     

글쓰기 공부와 관련해서 한 마디 덧붙인다면, 여기서부터 말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시작된다. 스스로 버린다는 의식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붉은 까마귀’를 보는 일에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다. 인식 관심이 미리 정해진 것이라면 무엇을 인식하든 그것은 선입견이거나 편견일 뿐이다. 객관적 인식이 ‘약(約)’의 경지라 했지만 그것도 인식 관심의 영역 안에서 요약되는 것이고, ‘오(悟)’라는 것도 결국은 나의 인식 관심이 절실히 요구하는 해답에 근접되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 관심을 정하지 않고 나아가기, 언제나 모험으로 시작하기, 그런 것들이 좋은 글쓰기의 전제가 된다. 허심포산(虛心抱山), 아는 것만으로는 늘 부족하다는 말이 여기서도 통용되는 격언이다.   

  

진정한 스승들은 늘 높은 구름 위에 앉아 있다. 그가 거기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가 어떻게 그 자리에 이르렀는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높은 경지를 바라보며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시샘하며 스스로를 닦달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도 제자들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된다. 그게 스승의 길이다.  

사진은 성공회 대구대교구 전경. 대구 시청과 동아백화점 사이에 있다. 오래된 건물은 아니지만 오래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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