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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14. 2019

복수와 용서

뻬드로 빠라모

복수와 용서망자(亡者)의 회고   

  

우리가 집단의 상처에 반응하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복수와 용서(망각)가 그것입니다. 그 중간쯤에 ‘증오(잊지 않고 기억하기)’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상처는 고통입니다. 고통은 되돌려 주거나 까맣게 잊을 때 우리 곁에서 사라집니다. 보통의 경우 학문, 예술, 종교, 도덕과 같은 문화(文化, 진리를 구하고 끊임없이 진보, 향상하려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 및 그 성과)는 용서를 권합니다. 승화시키거나 초월하기를 권합니다. 소설도 예술의 일환이므로 용서를 권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죄짓는 자이므로 누구나 복수나 증오의 주체이면서 용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천연덕스럽게(?) 그려냅니다. 과정은 처절한 복수(증오)로 일관하다가도 결말에 가서는 용서하는 인간만이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소설의 관행에서 ‘망자의 회고’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망자의 회고’는 논리를 뛰어넘어야 하는 용서를 그릴 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화법입니다. 소설 『뻬드로 빠라모』에 자주 등장하는 판타지 화법(망자의 회고)이 그 자체로 이미 용서의 주제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는 것도 그 까닭에서입니다. 복수와 증오의 현실 논리만을 믿고 의지하는 속인들에게는 아주 불편한 대화법이지만 현실을 버리지 않고 그나마 유지하면서 온전하게 그것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 하는 데에는 그런 ‘불편한 대화’들이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뻬드로 빠라모』라는 소설은 용서만을 권하지 않습니다. 용서의 화법 속에서도 복수와 증오를 부추기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존재합니다. ‘증오(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강조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이 소설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초대합니다.  

    

...렌떼리아 신부는 뻬드로 빠라모와 어깨를 스칠까봐 조심스럽게 관으로 다가갔고, 자못 부드러운 동작으로 성수를 들어 올려 주검 위에 뿌렸다. 그동안 그의 입술 사이로 기도문 같은 중얼거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무릎을 꿇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무릎을 꿇었다.

- 하느님 아버지, 당신의 종을 거두어주소서.

그의 마지막 기도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 평온히 잠드시길, 아멘.

성당 밖으로 관이 나가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신부는 성당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되살아나는 분노에 치를 떨기 시작했다.

- 신부님, 당신이 내 자식 놈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뻬드로 빠라모가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 - 소문에 따르면, 당신 형님을 내 아들 놈이 죽였다더군요. 더욱이 당신은 내 아들 놈이 당신의 질녀까지 욕보였다고 믿고 있으니 ,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나는 당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그렇지만 신부님, 이제 다 끝난 일이니 깨끗이 잊고, 하느님이 이미 모든 죄를 사했을지도 모르는 불쌍한 그놈을 용서하시지요.

그는 금화 한 줌을 긴 의자에 붙은 기도대에 올려놓은 다음, 몸을 일으키며 덧붙였다.

- 성당에 바치는 헌금으로 생각하고 받아주시오.

성당 앞에는 장정 둘이 빼드로 빠라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들은 앞서 관을 메고 떠난 일행들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메디아 루나에서 십장으로 일하는 장정 넷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편 렌떼리아 신부는 뻬드로 빠라모가 놓고 간 금화를 하나하나 거둔 뒤에 단상으로 다가가 두 손을 모았다.

- 하느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자는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인간입니다. 이 돈이 과연 거두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께서 알고 계십니다. 저는 당신의 발밑에 엎드려 당신의 지혜를 구하고자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바라건대 못난 저를 대신해 그 인간에게 벌을 내리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렌떼리아 신부는 성기실(聖器室)의 문을 닫고 감실(龕室)로 발길을 옮겼다. 그는 감실로 들어서자마자 한쪽 구석에 쓰러진 채 고통과 비애에서 나오는 눈물이 마를 때까지 한없이 울었다. 

- 모든 것이 당신의 뜻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후안 룰포, 정창 옮김, 『뻬드로 빠라모』, 세계문학전집93, 민음사, 2004(3쇄), 36~37쪽]    

 

죽은 자는 미겔 빠라모라는 뻬드로 빠라모(돈 뻬드로)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처럼 악하고 음탕한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망자와의 대화’ 형식으로 이미 독자들에게 알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습니다. 렌떼리아 신부는 그에게 폭행을 당한 어린 조카를 안아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몹쓸 짓을 저지른 자를 거두어 가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구나. 얘야, 이제 와서 그자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있든 없든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란다.”

렌떼리아 신부는 용서보다 증오를 택합니다. 불편하다고 ‘상처의 기억’을 잊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용서 속에 구원이 있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긴 하지만, 망각까지는 할 수 없다고, 부질없는 용서에는 함부로 나서지 않겠다고 신에게 고합니다. 인간의 세상에는 인간들이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저를 대신해 그 인간에게 벌을 내리”라고 기원합니다. 이 소설의 주제가 용서 하나만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렌떼리아 신부의 기도를 통해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대명천지,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돈 뻬드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변함없이 악의 화신이고, 거들먹거리며 많은 수하를 거느리고 있고, 걸핏하면 ‘돈으로 구원을 사고’, 시시때때로 폭력으로 약한 자들 위에 군림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도처에 있는 그들은 오로지 그 악의 크기에서만 차이 날 뿐 생생하게 여전히 존재합니다. 핍박받는 우리는 다만 ‘그들을 거두어 가 주시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행동에 나서지 못합니다. 보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저도 언젠가 그런 간절한 기도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 유산을 통째로 가로챈 ‘돈 뻬드로’에게는 감히 대들지 못하고 구차하게 ‘이미 시효가 지난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오래된 빚 문서’ 한 장을 저에게(가난한 저에게!) 들이미는 불쌍한 문화적 ‘조카’를 한 사람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당부했습니다. 저처럼 늙기 전에, 딱 지금의 저만큼이라도 그에게 저항하라고요. 뺏긴 것을 돌려달라고 크게 외치라고요. 그러면 언젠가는 하느님이 반드시 이 세상에서 돈 뻬드로를 거두어 가실 것이라고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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