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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18. 2019

자연에서 배우는 가정교육의 세 가지 방법

황제나비, 줄탁동시,연꽃씨

자연에서 배우는 가정교육의 세 가지 방법     

부모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가르치는 자'가 됩니다. 그래야 부모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가르치지 않는' 부모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안 가르쳐도 자녀들이 알아서 잘 크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모가 없어야(최소 한 명은) 자식이 제대로 된다.”라고 강변하는 이도 있습니다. 부모의 과보호가 자식의 앞길에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을 과장해서 말한 것이라 이해합니다. 가장 안 좋은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것만 가르치는 부모의 경우일 것입니다. 자신의 사회 부적응증이나 콤플렉스, 혹은 취향을 일종의 ‘특별한 자질’이나 사회적 성취의 하나로 간주해서 제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경우도 왕왕 봅니다. 평생 운동과 담 쌓고 지내면서 살아온 아버지들은 아들이 운동하는 것을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반대할 때가 많습니다. 그 빈대로 운동지상주의의 아버지들도 꽤 있습니다. 

어쨌든 가르치지 않는 부모보다는 가르치는 부모가 일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광주교대 박남기 교수님의 교육칼럼(최고의 교수법 중에서, 2015. 5. 17. 페이스북)을 읽고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세 가지 방법'을 한 번 유추해 보았습니다. 황제나비형, 줄탁동시형, 연꽃씨형이 그것입니다.   

  

<황제나비형>

황제나비형은 매사 혼자 익히고 깨치도록 자녀를 방목, 방치하는 교육방법입니다. 백련자득(百鍊自得), 자력갱생(自力更生)이 모토가 됩니다. 황제나비가 제 고치를 벗고 나오는 힘으로 비상의 능력을 축적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답습, 확장한 교육론입니다. 성공만 하면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자녀교육법입니다. 언젠가 한 부모교육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단 꼭 나만큼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가르쳐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주로 독서교육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였습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젊은 엄마들의 과도한 치맛바람을 염려한 발언이었습니다. 부모는 항상 자기 수준에서 자녀를 도울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도 그렇고 정신적인 것도 그렇습니다. 물질은 풍부한데 정신이 그렇지 못할 때는 물질만 도와주는 게 맞습니다. 앞뒤 안 가리고 지나치게 자식을 내 품 안에서 키우겠다는 것은 결국 자식을 내 아바타로 만들겠다는 심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아이를 나보다 더 뛰어난 인재로 키우고 싶다면 황제나비형 교육관을 존중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줄탁동시형>ㅏ

줄탁동시(啐啄同時), 혹은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은 교대나 사대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학생의 노력과 교사의 도움이 제때제때 서로 조화롭게 작용해야 교육의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뜻입니다. 보통 학교나 가정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바로 이 '줄탁동시'입니다.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 생각 자체가 교사나 부모의 입장이 크게 반영된 것이라는 것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 알에서 아직 바깥세상으로 나오지 못한 ‘눈도 뜨지 못한 새끼’들에게는 줄탁동시의 의미가 그렇게 각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줄탁동시는 교사나 부모의 과도한 기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알 안에서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끼의 노력이 없기 때문에 밖에서 쪼아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어미들이 많이 고통스러운 게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알에서 나온 아이들은 좀 달라질 것이라 기대하면 그것도 큰 오산입니다. 아이들은 이미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상태'이기 때문에 또 하나의 탄생, 즉 '사회적 탄생'을 위해 진짜 고통스러운 ‘알을 깨고 나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것을 가르쳐주어냐 하는 이가 바로 부모와 교사입니다. 한 번 더 강조하겠습니다. 줄탁동시는 오직 그 의미에서만 교육방법이나 교육관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교사)의 의무입니다(석봉 어머니의 떡 썰기가 그 예가 됩니다). 말로 가르치지 않고 몸으로 보여서 자식이나 제자들이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연꽃씨형>

연꽃 씨는 수백 년을 견디는 견고한 껍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아를 도와주는 외부의 손길이 연꽃에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외부에서 어떤 물리적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씨는 발아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100프로, 선제적으로, 자기 아이를 기획 교육하는 교육방법을 그래서 '연꽃씨형'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단 이 경우는 아이의 자질이 확실하게 뛰어나다는 것을 반드시 확인한 연후에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배운 부모들은 제 자식의 능력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14K, 18K, 24K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24K일 때만 유용한 방법이 연꽃씨형입니다. 물론 부모도 당연히 24K여야 합니다. 자기는 14K이면서 24K 아들의 정련과정에 주도적으로 개입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망발입니다. 어제 오늘, 일부 몰지각한 14K(아예 가짜 금?) 교수들이 자기 아들을 연구논문 공동저자로 올려서 큰 사회적 물의를 빚는 것을 봅니다. 최악의 연꽃씨형 자녀 교육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옛날에 '가정에서의 독서, 작문 교육'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어머니의 역할을 맹모형, 석봉모형, 율곡모형으로 나누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율곡을 가르친 방법이 연꽃씨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크게 보면 황제나비형은 ‘맹모삼천’(孟母三遷,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함)과 유사하고, 줄탁동시형은 석봉의 어머니가 취한 교육방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식들을 다 키워보고 나서 드는 느낌입니다만, 타고나는 것을 이길 '방법론'은 이 땅 위에서는 없는 것 같습니다. '타고나면', 약간의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결국 갈 곳을 찾아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타고 나지 않은 것을 부모의 욕심으로 마냥 채워 넣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어떤 부모를 가지고 태어나는가'가 아이가 타고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점도 우리 부모들이 꼭 알아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 부모들의 '내 탓이오, 내 큰 탓입니다.' 적어도 자녀 문제에 관해서는 그렇습니다.    

 

참조. 박남기 교수님의 포스팅에 제가 댓글로 단 내용입니다.     

양선규 : 잘 읽었습니다. 검도 수업을 할 때는 '줄탁동시'가 가장 유용한 이론인 것 같습니다. 스스로 깨치지 않으면 더 높은 경지를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백련자득'을 많이 강조하는 게 검도 수업입니다. 그 입장에서는 '황제나비'의 경우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경지에 오른 스승이 한 수 가르쳐주는 것이 제자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이 될 때가 많기에 '줄탁동시'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입문의 동기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성취의 한 조건으로 좋은 가르침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기예 학습 혹은 몸공부의 두드러진 특징인 것 같습니다. 

문예창작은 아무래도 '황제나비' 쪽인 것 같습니다. 좋은 스승의 지도를 받고 등단을 하더라도 혼자서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은 곧 도태가 되거든요. 

'제도'의 성격이 짙은 공교육은 '연꽃씨'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께 맞으면서 공부한 것이 지금도 오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상 제가 해 본 것 안에서 박교수님의 가르침을 적용해 본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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