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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21.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유미주의-상처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2

유미주의상처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2


상처 없는 영혼은 없다. ‘상처’라는 말을 써놓고 보니, 랭보, 한수산, 조용필이 연상된다. 물론 자유 연상이다. 젊어서 이 세 사람을 만났는데 참 좋았다. 열아홉에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세상을 조롱하듯 홀연히 사라진 천재 시인 랭보, 군사 정권 아래서 피눈물을 흘리고 그 상처에 끝까지 맞선 한수산, <창밖의 여자>로 보란 듯이 돌아온 가객 조용필, 이들에게 아마 내 안의 상처들이 크게 공명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생각이다. 그때는 그런 ‘내맡김’ 같은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냥 좋고, 그냥 따라 하고 싶었을 뿐이다. 


랭보는 한수산 소설에서 처음 만났다. 「사월의 끝」인가, 『해빙기의 아침』인가, 확실치 않다. 한수산 선생과는 『신동아』에서 함께 글을 싣는 인연도 있었다. 1987년 대선 때 일이다. 한 선생님은 노태우 후보, 나는 김대중, 김종필 후보의 유세 장면을 리뷰했다. 그때 한 선생님이 보여준 강기(剛氣)가 대단했다. 불의와 맞선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 죽어도 되겠다, 순간 그런 충동마저 일었다. 조용필은 이제 듣기만 한다. 최근에 다시 뽑은, 차에서 듣기 위한 ‘엄선 30곡’ 안에 여전히 그가 부른 노래 대여섯 곡이 들어갔다. 얼마 전 딸네가 내 차에 동승하는 일이 있었는데, “나는 30년 동안 똑같은 노래를 듣네”라는 딸아이의 소감을 들어야 했다.   


누구는 ‘상처’를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 심리학 쪽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대개 그렇다. 그렇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 ‘상처’란 것들이 결국은 다 인간을 따라 ‘죽을 운명’인 것들이다. 영생하는, 영원한 상처는 없다. 다 고만고만한 것들이다. 사람들은 모두 비슷하게 태어나고 비슷하게 죽는다. 치매가 되든, 발작이 되든, 소설이 되든, 시가 되든, 노래가 되든, ‘연금술’이 되든, 각자 자기 방식으로 자신의 상처에 햇볕을 쬐고 언젠가는 박멸될 운명이다. 숨어 있어야 ‘상처’인데 만천하에 드러나니 그냥 ‘흉터’가 된다. 흉터를 보고 그것이 ‘상처’의 뒤끝인 줄 알지만,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운명’으로 착각한다. 글쓰기(소설)로, 그것 안에서의 유미주의로, 자신의 ‘상처’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현시한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다. 역시 『금각사(金閣寺』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주인공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꺼번에 온갖 것에 부딪쳤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에피퍼니(epiphany, 상징적 장면들이 지닌 계시적 의미)의 등장 장면이다. 


...숙부님 댁에서 두 채 거른 집에 예쁜 아가씨가 있었다. 우이꼬(有爲子)라는 이름이었다. 눈이 커다랗고 맑았다. 집이 부자인 탓도 있겠지만, 도도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취한다. 누구나 귀엽게 대해 주는데도 늘 혼자 있었고, 또한 뭣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질투심이 강한 여인네는 우이꼬가 아직 처녀인데도, 저런 인상(人相)이야말로 필시 애를 못 낳을 석녀상(石女像)일 거라는 소문까지 퍼뜨렸다.

우이꼬는 여학교를 나오자 곧 마이쯔루 해군병원 특채 간호부가 되었다. 병원은 자전거로 통근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아침 출근은 아직 어두운 새벽에 집을 나가므로, 우리들의 등교 시간보다도 두 시간은 빠르다.

어느 날 밤, 우이꼬의 몸뚱이를 생각하며 우울한 공상에 사로잡혀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나는, 아직 날이 새기도 전에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운동화를 신고 여름의 어두운 새벽에 집을 나섰다.

우이꼬의 몸뚱이를 생각한 것은 비단 그날 밤이 처음은 아니다. 이따금 생각났던 것이 돌돌 뭉쳐져 마치 그런 사념의 덩어리처럼 우이꼬의 몸뚱이는 하얗고, 탄력 있는, 어두컴컴한 그늘에서 자란, 냄새가 나는 하나의 고기의 형태로 응결되어 온 것이다. 나는 이 몸뚱이에 닿을 때의 손가락의 뜨거움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손가락에 튕겨지는 탄력이나, 꽃가루 같은 냄새를 생각했다.

나는 컴컴한 새벽길을 마구 달렸다. 돌도 내 발부리에 채이지 않고, 어둠이 내 앞에 활짝 길을 열어 주었다. <중략> 

나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우이꼬는 처음에 겁을 집어먹었으나 난 줄 알자 내 입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모름지기 새벽어둠 속에서 무의미하게 어물거리고 있는 쓸모없는 시꺼멓고 작은 구멍, 작은 들짐승의 집과 같이 볼품없는 작은 구멍, 즉 내 입만을 줄곧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외계로 이어지는 힘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음을 알아채리고는 안심했던 것이다.

「참, 별꼴이야. 말더듬이 주제에.」

우이꼬는 이렇게 말했으나, 이 말소리엔 아침 바람과도 흡사한, 단정하고 상쾌한 맛이 있었다. 그 여자는 벨을 울리면서 페달을 다시 밟았다. 돌을 피하듯이 나를 비끼더니 쏜살같이 달렸다. 개새끼 한 마리 없는데도, 멀리 바라보이는 밭 저쪽까지 달아나 버리는 우이꼬가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이따금씩 울리는 벨 소리를 나는 들었다. - 그날 밤, 우이꼬의 폭로로 그 여자의 어머니가 내 숙부 댁에 찾아왔다. 나는 항상 무던하던 숙부님한테 심한 꾸중을 들었다. 나는 우이꼬가 미워져서 죽기를 은근히 바랐는데, 마침내 몇 달 후엔 그 저주가 이루어졌다. 그다음부터 나는 남을 저주하는 일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三島由紀夫, 桂明源역,『金閣寺』, 삼중당문고(197), 1975, 14~15쪽)


우이꼬가 죽게 된 사연은 주인공의 저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이쯔루 해군 병원에 근무하던 그녀는 진중(陣中)의 한 병사와 사랑을 나누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병영을 이탈한 그 병사와 함께 그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게 된다. 주인공에게 그녀는 시종일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나’의 저주 따위가 근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미 지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끝내 그녀는 죽음마저도 ‘미의 화신(化身)’으로 맞이한다. 그녀가 죽음의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묘사한 다음 대목을 보면 그 사정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우이꼬가 혼자서 석회석 백 다섯 계단의 돌층계를 올라갔다. 미친 사람처럼 자랑스럽게. … 검은 양복과 검은 머리칼 사이로 아름다운 옆얼굴만이 희게 드러나 보인다.

달과 별, 밤하늘의 구름, 창(鉾) 같은 삼나무의 능선에 의해 하늘과 맞닿은 산. 달빛에 얼룩진 그림자, 희미하게 드러나는 건축물, 이런 배경 속에서 우이고의 배신에 의한 해맑은 아름다움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 여자는 혼자서 의젓이 이 흰 돌층계를 올라가기에 충분했다. 그 배신은 별이나 달이나 창 같은 삼나무와 흡사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우리들 증인과 함께 이 세계에 살면서 이 자연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우리들의 대표자로서 돌층계를 올라갔던 것이다. (위의 책, 20~21쪽)


우이꼬의 ‘배신’은 헌병들과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탈영병과 함께 죽음을 택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위의 인용문을 한 줄로 요약하면 ‘죽음을 각오한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이다. 그녀는 그 불가침의 아름다움으로 ‘나’를 구원한다. 그러니까, 마지막 줄의 ‘우리들의 대표자’라는 말은 ‘우리와는 크게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이면서도 자연의 모습처럼 하나의 절대미를 구현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대표자로서의 삶’만이 인생의 허접스러움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작가의 맹목적인 신념이 표나게 드러난다. 유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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