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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21.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유미주의-상처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1

유미주의상처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1


“자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아는 자가 진정한 프로다.” 

언젠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는 의사 친구에게 한 말이다. 흔히 말하는 계원(契員)이다. 10년 가까이 내가 페이스북에 쉬지 않고 글을 올리고 있는 것을 무척 신기한 듯이 바라보는 친구였다. 애초부터 그렇게 많은 글들을 대량 투하할 심산으로 페이스북에 입문하였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그 말에 그 친구가 화답했다.

“평생 동안 내겐 글쓰기가 모험이다.”

글을 쓰는 게 평생 해 본 일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런 사람들이 언젠가 프로가 된다. 모험인 줄 아는 게 큰 힘이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처음 소설 습작에 나서던 때 나도 그랬다. 그때는 대학 노트에 썼다. 한 줄 한 줄 메꾸어나가는 일이 꼭 비탈진 자갈밭을 개간하는 것 마냥 어려웠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팠다. 그야말로 글 농사였다. 그때가 생각나서 한 말인데 친구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위로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모험론’과 ‘프로론’이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굳이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만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다. 그 둘은 적어도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 안에서는, ‘미지의 경험’을 향해 매번 새롭게 출발하는, 반복적이면서도 늘 새롭게 다가오는, 잊지 못할 추억을 향한 기차 여행과 같은, 그런 ‘신기하고 신선한’ 일 안에서는 결코 서로 반목하지 않는다. 그게 맞다. 정말 좋은 일은 항상 그렇게 자체 모순을 내함(內含)한다. 그런 ‘안에서 부딪히는 것들’ 없이는 그 어느 것도 발광체가 될 수 없다. 

어쨌든, 묘사의 최종 병기는 ‘상처’다. 묘사가 경지에 도달하느냐의 문제는 그 ‘상처’의 시각으로 사물을 어떻게 그려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상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유미주의(唯美主義)다. 상처의, 상처에 의한, 상처를 위한 글쓰기가 바로 유미주의다. 묘사를 하고 싶은 자는 먼저 자신의 상처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찬찬히 들여다볼 일이다. 유미주의의 바이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金閣寺』에서 그 모범을 찾아보자.


그 여행에 있어서의 온갖 일은 지금도 뇌리에 자상히 되새길 수가 있다. 목적도 모르고 출분(出奔)한 건 아니다. 목적지는 중학 시절에 한 번 수학여행을 갔던 지방으로 정했다. 하지만, 그곳에 차츰 가까워지는 동안, 출발과 해방에 대한 생각이 너무도 가슴에 사무쳐서 내 앞에는 미지만이 전개되어 있는 것 같았다. 

기차가 달리는 그 길은 내가 태어난 고향으로 향하는 낯익은 길인데도, 낡고 시꺼멓게 된 열차가 이토록 신선하고 신기한 모습으로 보인 적은 없었다. 정거장이며, 기적 소리며, 그리고 이른 아침의 확성기에서 나오는 쉰 듯한 목소리의 울림마저 같은 하나의 감정을 반복하고 강조하였으며, 또 눈부실 만큼 서정적인 전망을 내 눈앞에 펼쳐 보였다.

아침 해는 광대한 플랫폼을 비추기 시작했다. 거기를 지나는 나는 구두 소리, 튕기는 게다 소리, 마냥 단조로이 울리는 벨, 구내 판매원의 광주리에서 내밀어진 귤의 빛깔…. 이 모든 것이 내 몸을 맡긴 커다란 사물 중의 하나하나로 여겨졌고, 또한 하나하나의 징조처럼 생각되었다. (三島由紀夫, 桂明源역,『金閣寺』, 삼중당문고(197), 1975, 196쪽)


기차 여행에 나서는 설렘을 단 몇 가지의 채색으로, 그러나 고루고루 하나도 빠짐없이,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는, 기차역 묘사 장면이다. ‘낡고 시꺼멓게 된 열차가 이토록 신선하고 신기’하게 보인 적은 없었다고 화자는 말한다. ‘낡고 시꺼멓게 된 것’을 ‘신선하고 신기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설렘’이 주변의 모든 것들에게 밝은 빛을 부여한다. 그 ‘밝은 빛’ 아래서, 휴대폰의 아이콘들이 일제히 한꺼번에 흔들거리는 것처럼, 그것들은 일제히 요동친다. 물아일체가 된다. 사물들은 ‘설렘’의 표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원천으로 그려진다. ‘설렘’이 우주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질서에 순응해 기차역 안의 모든 디테일들이(일상적 소음까지도) 완벽한 화음(和音)을 이룬다. 사로 다른 감각들, 소리와 빛깔까지 모두 하나의 감정에 봉사한다. 각기 다른 것들이 모여 전일적인 전체를 이루고, 나아가서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무엇인가의 징조(徵兆)가 되기에 이른다. 우주 안의 모든 것들이 마치 시계 속의 작은 부품들처럼,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모티프로 재배치된다. 요절 작가 미시마 유끼오는 그렇게 우리 안의 작지만 큰 ‘설렘’을 그려낸다. ‘미지’와 ‘설렘’, 그것이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그렇게 보여준다. 그렇게 완벽하게 ‘번지는’ 내적 체험의 실체를 공개한다.


앞으로도 몇 차례 더 ‘번지기’에 대한 공부를 더 해볼 생각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지에 대한 설렘만큼 감동적인 묘사의 한 필수 요건이 되는 것도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미지의 것에 대한 설렘에 쉬이(별다른 노력 없이도) 점거될 수 있는 사람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훨씬 더 많은 기회를 갖는다. 훨씬 더 번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내가 그토록 묘사에 서툴렀던 것도 이제 이해가 된다. 바로 그 까닭에서였다. 타고난 재능은 없는데, 상처는 깊고, 사랑은 멀었다. 번지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모르고’ 전망 없는 삶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설렘을 찾아 나서기는커녕 오직 서푼 어치 ‘생활의 발견’만을 위해서 살았다. 어쩔 수 없이 오직 먹고사는 일, 조금이라도 편하게 사는 일에만 몰두했다.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 데, 공연한 것을 이제 와서 깨쳤으니 괜한 수고가 뒤따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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