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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06. 2019

지나간 것들은 소리친다

비석

지나간 것들은 소리친다(저자 서문)  

   

지나간 것들은 소리친다. 그들에게는 침묵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응답한다. 그게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이거나 목표다. 그 목적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것저것 참조하고 호출한다. 호출된 기억들은 조금씩 수정되고, 배열도 새로 한다. 다른 작가의 책도 참조하지만 내 기억의 보완에만 사용한다. 그것들은 언제나 낯설다. 익숙한 것들이지만 항상 낯설다. 오래된 기억을 소환한다는 것은 모험이다. 그것은 유골이 아니다. 공기를 만나 산화되면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는 시한(時限)을 알 수 없는 시간 폭탄이 장전되어 있다. 얼른 ‘새로운 질서’ 안으로 옮겨야 한다. 때를 놓치면 죽어 있는 것보다 훨씬 해롭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혼자를, 혹은 낯익은 순서를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기억을 소환하고 재배열하는 데 가장 먼저 참조한 책들이 미셸 트루니에의 『외면일기』와 로렌 아이슬리의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 책들과의 공동 저술이다. 물론, 이전에 내가 쓴 것들도 모두 참조사항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새로 쓰는 게 아니다. 그저 앞의 것들을 가지런하게 다시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은 이 글쓰기의 도화선이다. 자신의 내면을 이다지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책을 나는 여태 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가 거북하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독자들의 상처를 유발한다. 또 다른 상처를 만든다. 위안의 글쓰기가 아니다. 주변 사람들, 가족과 동료, 친척들을 말할 때에도 그 어조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일단 그의 이야기 속으로 초청받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인격도, 사회적 위신과 지위도, 인정된 가식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작가는 기대되는 모든 낯익은 것들을 거부한다. 남은 종이가 몇 장 되지 않을 때까지도 책은 시종 불손하고 무례한 톤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런 불편한 몇 시간이 흐르고 나면 문득 책의 진면목이 눈에 들어온다. 제목처럼,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생이란 언제나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었다..     


밤이면 이런저런 것들이 내게 돌아온다. 이따금씩 그것은 사라져버린 한 얼굴에 대한 꿈이고 나는 힘겨운 심장으로 일어나 그 순간과 그 희망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꽤나 차분해진 마음으로 다시 눕는다. 하지만 다른 꿈들은 난폭하고, 제멋대로라서 어둠 속을 쳐대게끔 만들 정도다. 아니면 울 이유도 없는데 울게 만든다. 아니면 더 이상 두려워할 확실한 근거도 없는데 두려움으로 헐떡거리게 만든다. 아니면 잠 못 들고 두뇌 속 사진들이 오가고 그것을 멈추거나, 누르거나, 뭐라 명령할 수 없다. [로렌 아이슬리(김정환 역), 『그 모든 낯선 시간들』, 강, 2008. 298쪽]     


그에게는 글쓰기가 일종의 노이즈 콘트롤이었다, 그가 밤에 맞닥뜨린 것들, ‘불안’, ‘슬픔’, ‘두려움’ 등의 정서와의 대면이었다. 그는 인생에 주어진 시간들의 그 질서 없음과 무도함과 난폭함, 그리고 부질없음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을 헤치고 나온 한 외로운 영혼에 대해 가감없이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후생(後生)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보태고 싶었다. 이승에서의 삶을 너무 팍팍하게 여기지 말라고, 누구에게나 생은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라는 것, 자기 같은 사람도 있었으니 작으나마 동병상련하라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로렌과 달리 아직 좀 더 예의바른 시간을 원할 수도 있었다. 스스로 정돈된 시간 속에 놓여진 삶이길 원할 수도 있는 거였다. 그들은 적당한 가식과 적당한 비굴, 적당한 타협과 적당한 공모(共謀) 속에서 인생을 상처 없이 가꾸어 나가고 싶어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요구된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런 이들에게는 로렌의 글쓰기는 완전 날벼락이다. 그런데 로렌은 오히려 그걸 ‘삶의 의미를 가지런히 해보려는 개인의 마지막 시도’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눈 내리기 전 인간의 가을 풍경이라고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녹슨 심장 속 용수철이 부서지기 전에 그리고 꿈, 기억 및 그것들을 담고 있는 그 애매한 화학 영역이 회복 불가의 산산조각으로 날아가 버리기 전에 자신의 삶의 의미를 가지런히 해보려는 개인의 마지막 시도다.(299쪽)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생(生)은 우주가 남긴 아주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먼지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될 것인가? 그렇게 보면, 우주 안에 의미 있는 것은 없다. 있다면 우주뿐이다. 그러니, 우리에겐 무엇의 의미를 안다는 일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주의 언어를 모른다. 행여, 만에 하나, 우리가 우리 삶의 의미를 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     

사진은 대구사범 옛 건물에 세워져 있는 두 비석. 하나는 본인이, 다른 하나는 후세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모든 글쓰기는 스스로 세우는 비석(碑石)일 뿐이다.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나는 이랬다저랬다 긴가민가 하는 불안한 중생이다. 뭘 가르치려 들어도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미숙아다. 안들 무슨 소용인가?” [김이듬, ‘퇴폐라뇨$&#?’, 『시와 반시』, 200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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