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Jun 07. 2019

물 맛 좋은 우물이 먼저 마른다

장자

물 맛 좋은 우물이 먼저 마른다 

    

『장자(莊子)』에는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일종의 우화(寓話) 모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세상의 이치(理致)를 재미있게 형용(形容)해 내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다음은 인터넷을 뒤져 찾은 ‘산목(山木)’편에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장자가 산 속을 걷다가 잎이 무성하고 가지가 크게 뻗은 큰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무 베는 사람이 그 곁에 멈추고 있으면서도 베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쓸 만한 곳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없음을 가지고 그 타고난 수명을 마치게 되었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장자가 산에서 나와 오래된 벗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벗이 기뻐하며 하인에게 거위를 잡아서 삶으라고 명했습니다. 하인이 묻기를 “한 놈은 잘 울고 또 한 놈은 울 줄을 모르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자, 주인이 말하기를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제자가 장자에게 묻기를, “어제 산 속의 나무는 쓸모없음을 가지고 타고난 수명을 마칠 수 있었고, 오늘 집주인의 거위는 쓸모없음을 가지고 죽었으니, 선생님께서는 장차 어디에 처하시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장자가 웃으면서 말하였습니다. “나는 장차 재(材)와 불재(不材),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처하려네. 재와 불재의 사이란 옳은 듯하면서도 그른 것이니 폐단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야. 만약 대저 도덕(道德)을 타고서 떠다닌다면 그렇지가 않겠지. 기림도 없고 헐뜯음도 없으며, 한 번은 용이 되고 한 번은 뱀이 되어 때와 더불어 함께 변화하면서 오로지 한 가지만 하기를 즐기지 않을 것이요, 한 번은 올라가고 한 번은 내려가서 조화로움을 법도로 삼아 만물의 근원에서 떠다니며 노닐어 사물로 사물을 부릴 뿐 사물에 부림을 받지 않을 터이니 어찌 폐단이 될 수 있겠는가? 이는 신농(神農)과 황제(黃帝)의 법칙이라네. 대저 만물의 정(情)이나 인륜(人倫)의 전함 같은 것은 그렇지가 않지. 합하면 갈라지게 마련이고, 이루고 나면 무너지며, 모가 나면 깎이고, 높이면 구설이 있게 되며, 유위(有爲)하면 공격을 받고, 어질면 도모함을 받으며, 못나면 속임을 당하고 마니, 어찌 폐단 면하기를 기필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자네들은 이를 기억해야 할 것이네! 오직 도덕의 고장에서만 이 모든 일이 가능한 일임을 말일세.”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깥에 마음을 빼앗기면 자기를 제대로 못 본다는 우화입니다. 하루는 장자가 조릉이란 곳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노라니, 남쪽에서 이상한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날개는 일곱 자나 되고, 눈은 한 치나 되는 큰 놈이었습니다. 까치는 장자의 이마를 스치고 날아가서 가까운 밤나무 숲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날아가는 품새와 앉아 있는 자세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상한 새다. 저렇게 큰 날개를 가지고도 잘 날지를 못하고, 저렇게 큰 눈을 가지고도 앞을 잘 보지 못하다니"라며, 장자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밤나무 숲으로 들어가 까치에게 화살을 겨누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바라보니 그 까치의 행동이 어색한 것이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버마재비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까치는 버마재비를 낚아채려고 장자가 가까이 다가와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장자는 이번에는 버마재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버마재비는 까치가 자기를 노리고 있는 것도 까마득히 모른 채 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매미도 버마재비가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버마재비도 까치도 자신의 먹이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자기 몸이 위험에 빠져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장자는 "자신의 먹이를 보느라고 제가 죽을 줄은 꿈에도 모르는구나. 눈앞의 이익을 좇는 자는 해를 당하는구나. 위험하기 짝이 없구나!"라고 탄식하면서 활과 화살을 버리고 황급히 밤나무 숲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뒤쫓아온 밤나무 숲지기에게 붙잡혀 도둑으로 오인을 받고 욕설을 들었습니다. 까치를 노리던 장자 또한 숲지기의 표적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장자는 사흘을 우울하게 보냈습니다.    

 

또 있습니다. ‘감정선갈(甘井先竭)’입니다. 물맛이 좋은 우물이 먼저 마른다는 뜻으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일찍 쇠함을 비유합니다. 진(陳), 채(蔡) 등의 땅에서 수난을 받은 공자와 은자(隱者) 태공임(大公任)의 대화를 통하여 장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처세술을 강조합니다. 

7일 동안이나 익힌 음식을 구경도 못하고 매일 날것만 씹고 있던 공자를 태공임이 조문(弔文)왔습니다. “죽기 싫으십니까”라고 그가 묻자 공자가 “죽기 싫소”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태공임이 ‘죽음을 피하는 방법(不死之道)’을 가리켜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동쪽 바다 위에 새 한 마리가 있는데 이름이 의이(意怡)입니다. 게을러 날개짓을 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무능한 새라서, 앞으로 날아갈 때는 선두에 서지 않고, 뒤로 물러설 때는 후미에 있지 않고, 먹을 때도 먼저 입을 대지 않고 남는 것만을 먹습니다. 따라서 외부의 그 누구의 침입도 받지 않고, 화를 면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는 ‘곧은 나무가 먼저 베이고(直木先伐), 달콤한 우물물이 먼저 마르는(甘井先竭)’ 법이랍니다.”     


장자의 ‘산목’편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무작위(無作爲)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울음을 울지 못하는 거위’이야기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소리 내지 않으면 곧잘 억울한 일을 당하는 세간의 이치를 짐짓 드러내기도 합니다. 장자는 작위와 무작위, 앞서기와 뒷서기의 묘를 잘 살릴 것을 주문합니다. 그 뜻은 알겠는데, 그 실천의 묘를 터득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도덕’도 그렇고 ‘사이’도 그렇습니다. 재와 불재는 아무나(그 주체된 자나 물질)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신의 맥락(context) 속에 두고 부릴 수 있는 자가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부리는 자의 맥락이 손닿을 수 없는 곳에 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세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장자가 말한 ‘사이에 처하는 것이다’의 한 뜻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치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이란 없지만 항상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 유효한’ 기준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거하면서는 ‘사이에 처한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의 제 인생이 ‘사이에 처하는 것’과 ‘주변에서 눈치보며 머물기’를 분별하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 아니었던가 하는 반성이 듭니다. ‘도덕’이 그 모든 것의 성패(成敗)를 가름한다는 것을 깊이 알지 못하였던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마지막은 언제나 ‘윤리적 실천’이라는 것을 그저 머리로만 알았던 것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나이를 먹고서야 비로소 그런 이치를 좀 알겠습니다. 못난 인생, 길지 않은 여생이라도 이제는 좀 떳떳한 ‘사이에 처하기’를 도모해야겠습니다. 저의 이번 ‘문학’이 그런 행사(行事)의 일환이었기만을 고대할 뿐입니다.   

  

사족 한 마디. 아무리 ‘도덕’이 중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일이 ‘연못을 말려 고기를 잡는 일(竭澤而魚)’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지금의 나랏일도 좀 그런 것 같습니다만, 주변 일상에서도 그 부작용이 우심한 것 같습니다. ‘갈택이어’로 세를 얻은 이가 더 이상 연못에서 건질 고기가 없어 낭패를 겪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먹고 살 일은 아직 태산인데 그렇게 ‘고기의 씨를 말리고’ 어떻게 남은 세월을 이어갈지가 보는 저로서도 고민거리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무엇이든 ‘끝까지 가서’ 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어디서나 피할 일입니다.     

‘갈택이어’는 연못을 말려 고기를 얻는다는 말로, 진나라 문공(文公)이 성복이라는 곳에서 초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초나라 병사의 수가 진나라의 그것보다 훨씬 많았을 뿐만 아니라 전투력 또한 막강해 승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문공이 고민 끝에 호언에게 물었습니다. “초나라의 병력은 많고 우리 병력은 적으니 이 싸움에서 승리할 방법이 없겠는가?”그러자 호언은 “예절을 중시하는 사람은 번거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에 능한 자는 속임수 쓰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속임수를 써 보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가만히 듣다가 잠시 후, 문공은 또 다시 이옹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이옹은 호언의 속임수 작전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별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옹은 멈칫거리다가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어 물고기를 잡으면 잡지 못할 리 없지만 그 훗날에는 잡을 물고기가 없게 될 것이고((渴澤而漁豈不獲得明年無魚), 산의 나무를 모두 불태워서 짐승들을 잡으면 잡지 못할 리 없지만 뒷날에는 잡을 짐승이 없을 것입니다(焚藪而田 豈不獲得 而明年無獸)”라고 조언합니다. 여러 모로 요즘 세태를 되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지나간 것들은 소리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