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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08. 2019

작은 것도 크게 쓰면

이야기의 본류

작은 것도 크게 쓰면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에는 ‘평범한 것(사람)이 특별한 것(사람)을 능가한다’라는 내용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세상에는 평범한 사람들이(그렇게 자인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겠죠. 아니면 특별난 것으로 알려진 것들이 그 내막을 살폈을 때 별 것 없는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사람살이가 균등(均等)하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권력 없는 사람)도 행복할 때가 있고 부자인 사람(권력 가진 사람)도 불행할 때가 있기를 바랍니다. 간혹 그런 기대와 바람을 뒤집는 이야기가 나와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변종들이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이야기의 본류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대와 바람을 떠나서는 존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 ‘기대와 바람’을 비꼬거나 뒤집는 것들을 주인의 자리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래서 우도할계(牛刀割鷄,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음)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장자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합니다.      

  

...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말했다. “위왕(魏王)이 큰 박씨를 주길래 그것을 심었더니 크게 자라 5석(石)이나 들어갈 정도로 큰 열매가 열렸소. 거기에 물을 담자니 무거워 들 수가 없고, 둘로 쪼개서 바가지로 쓰자니 납작하고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소. 확실히 크기는 컸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 부셔버리고 말았지요.”(장자의 주장이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다는 것을 풍자한 것) 장자가 말했다. “선생은 큰 것을 쓰는 방법이 매우 서툴군요. 송(宋)나라에 손 안 트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소. 그는 (그 약을 손에 바르고) 대대로 물로 솜 빠는 일을 가업으로 이어왔소. 한 나그네가 그 소문을 듣고 약 만드는 방법을 백금(百金)으로 사겠다고 하자, 친척을 모아 의논하기를 <우리는 솜 빠는 일을 대대로 해 오고 있지만 수입은 불과 몇 푼에 불과하다. 이 기술을 팔면 단박에 백금이 들어온다. 그러니 팔도록 하자> 하였다오. 나그네는 그 약 만드는 법을 가지고 오왕(吳王)을 찾아가 설득했소. 마침, 월(越)이 쳐들어오자 오왕은 이 사람을 장군으로 삼았는데, 겨울에 월군(越軍)과 수전(水戰)을 하여 크게 그들을 무찔렀소. (월군은 손 트는 고통 때문에 가진 전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었다) 오왕은 그 공적을 높이 사 그 사람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소. 손을 트지 않게 하는 일은 매 한 가지였으나, 한 사람은 그 기술로 영주(領主)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고작 솜 빠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그쳤소. 그것은 그들이 같은 것을 가졌으나 쓰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오. 지금 선생에게 5석이나 들어가는 박이 생겼다면 어째서 그 속을 파내 큰 술통 모양의 배를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즐기려 하지 않소. 즐길 생각은 않고 그저 납작해서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는 걱정만 하고 있으니 그게 바로 선생의 마음의 병통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장자』 내편, 「소요유(逍遙遊)」, 안동림 역주, 『莊子』 참조]      


장자의 소론(所論)이 이미 그 시절부터 많은 시빗거리를 불러왔던 모양입니다. 모양만 크고 그럴듯하지 실생활에는 별반 도움을 주지 못하는 ‘공허한 이론’이라는 비난을 꽤나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비판에 장자는 “그렇지 않다. 너희들이 그것을 쓰는 방법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대응합니다. 물로 솜 빠는 사람들의 손 안 트는 가전(家傳) 비법이 한 나라를 구하는 결정적인 전략(戰略)이 될 수도 있음을 왜 모르느냐고 다그칩니다. 아주 특별난 것 하나로 세상 이치를 다 설명해 버립니다. 궤변이지만,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장자의 반박을 접하면서 독자들은 ‘과연 그렇구나!’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 이 말은 ‘물래이순응’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이 지닌 물성을 보고, 순순히 그것에 반응하여, 내게 가장 유익한 면을 그 안에서 찾아내면 될 일인데, 현재의 내 소용(所用)에 우격다짐으로 그것을 집어넣을 생각만 하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우매한 짓거리임에 분명하다고 공감합니다. 비꼬고 뒤집는 이야기지만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이야기의 쾌(快)가 있기에 “역시 장자의 지혜는 크고 깊은 것이다”라고 감탄합니다.   

  

검도이야기 한 토막 하겠습니다. 현대 검도는 ‘죽도(竹刀) 검도’입니다. 검도 경기는 호구를 착용한 상태에서 죽도로 상대의 정해진 가격 부위(머리, 목, 허리, 손목)를 가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히 죽도의 길이와 무게가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길이는 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무게는 들어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아무래도 무게가 가벼우면 좀더 죽도를 빠르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기 전에 죽도를 검량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자 성인 기준 500g 정도의 무게가 정량입니다. 그런데 고수(高手)가 되면 도리어 죽도 무게를 늘려 잡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손잡이(칼자루)가 두껍고 무게가 몇 십 그램 더 나가는 죽도를 선호할 때가 있습니다. 죽도가 가벼우면 칼 쓰는 맛이 오히려 경감되어 재미가 덜하다고들 말합니다. 고수는 아니지만 저도 그런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두껍고 무거운 칼에 몸을 실어서 상대를 가격할 때 그 쾌감이 일층 증가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술 면에서도 죽도의 무게를 이용해서 간발의 차이로 더 빠른 가격을 해낼 수 있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몇 년 전 한 검도 잡지에서 그와 관련된 대화를 한 번 본 일이 있습니다. 전성기 시절 무거운 죽도를 쓰는 것으로 유명했던 한 원로 검도인을 기자가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아직도 무거운 죽도만 고집하십니까?”

일반적인 경우로 상정해 보면 그는 그때쯤이면 왕창 무게가 나가는 죽도를 사용하는 게 마땅했습니다. 기자도 그런 차원에서 신기록이 되는 ‘새로운 무게의 발견’을 원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닐세. 요즘은 가벼운 것을 무겁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네.”

인체에는 한계가 있어 근력이 마냥 늘어나지는 않는 것, 노년에 접어든 몸으로 옛날의 힘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기량(技倆)이 허용하는 한에서 최대한 무겁게 사용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말로는 무엇이든 다 말할 수 있고, 머리로는 무엇이든 다 이해할 수 있지만, 몸으로 하는 것에는 그런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할 수 있는 것’, ‘해 본 것’만이 가능한 것이 바로 몸 공부의 세계였습니다. 해 보지도 않고, 그것이 과연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말로만, 그저 머리로만 하는 것은 몸 공부가 아니었습니다. 몸을 배반한 채, 관념(자아도취)으로, 고집(편견)으로 일관하는 것은 몸 공부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저 ‘말’과 ‘생각’에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장자의 이야기가 들쑥날쑥할 때가 많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다른 까닭에서가 아니라 ‘몸 공부’를 전제한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은 이야기인가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자의 이야기가 한갓 궤변이나 우화로만 취급되지 않는 소이도 바로 거기에 있지 싶습니다. 가벼운 것을 무겁게 쓰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무거운 것을 마구 휘두를 수 있는 힘을 과시하는 것이, 그래서 몸을 해치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 싶습니다. 그게 인문학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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