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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09. 2019

커다란 긍정

커다란 하나의 에로스

커다란 긍정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다. ‘된다’가 있으면 ‘안 된다’가 있고, ‘안 된다’가 있으면 ‘된다’가 있다. ‘옳다’에 의거하면 ‘옳지 않다’에 기대는 셈이 되고, ‘옳지 않다’에 의거하면 ‘옳다’에 의지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성인(聖人)은 그런 방법에 의하지 않고 그것을 자연의 조명(照明)에 비추어 본다. 그리고 커다란 긍정에 의존한다(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而照之於天 亦因是也).” [『장자』 내편, 「제물론(齊物論)」, 안동림 역주, 『莊子』 참조]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란 말이 생각납니다. 인용문 말미의 “그리고 (성인은) 커다란 긍정에 의존한다(亦因是也).”라는 말 때문입니다. 그 말이 울림이 꽤나 컸던 모양입니다. 왜 그 말이 이제야 제 눈에 들어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연필로 진하게 밑줄까지 쳐져 있는데 말입니다. 왜 궁색한 재독(再讀)에 와서야 그리 크게 울리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그 두 말은 전혀 다른 맥락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흑(黑)이고 하나는 백(白)입니다. 하나는 그늘에서 자라나는 것이고 하나는 밝은 태양 아래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라는 말을 제가 본 것은 일본의 군국주의자 작가 미시마유키오(三島由紀夫)에 관한 소론(所論)에서였습니다(김항, 「천황과 폐허 : 상승과 하강의 벡터」). 미시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중에 문득 든 생각이지만, 전쟁은 에로틱한 시대였다. 지금 항간에 범람하는 지저분한 에로티시즘의 단편들이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로 모아져 정화되던 시대였으나 전후(戰後)는 나에게 삼등석에서 보는 연극 같은 것이었다. 모든 것에 진실이 없고, 겉모습뿐이며, 공감할만한 희망도 절망도 없었다.” 그는 공습이 한창이던 전쟁 말기에 동원된 젊은이들의 생활을 그린 희곡 「젊은이여 되살아나라」(1954)에서 공습의 위험 속에서는 열렬히 사랑하던 젊은 남녀가 패전 직후에 헤어지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재회하자는 소녀에게 남자는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속한 날에 만날 수 있을까 없을까는 모두 하늘의 섭리에 달려 있었어. 생각해 보면 사람 사이의 약속이 아름다운 것은 아마 이런 상태 속에서 뿐일 거야. 약속이 지켜질 보증이 없는 상태, 게다가 지킬 수 없음이 결코 사람 탓이 아닌 상태, 그런 상태뿐이야.” 전쟁 중에 가능했던 ‘커다란 하나의 에로스, 공포와 비참을 넘어 모든 욕망이 하나로 합일되는 그 정화와 신성의 상태’가 소멸되었으니 자신의 사랑도 소멸되고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미시마유키오의 유미주의(唯美主義)는 그렇게 독(毒)든 버섯처럼 황폐화된 일본의 전후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인간의 어두운 내면, 그 그늘의 우울을 먹고 그렇게 속성(速成)으로(버섯처럼) 자라납니다. 그가 원한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는 긍정의 철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만 보고 다른 쪽으로는 아예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대시(大是)’가 아닌 ‘소시(小是)’의 인생관이었습니다. 천도(天道)에 어긋나는 역천(逆天)의 윤리였습니다. 마흔 다섯 살의 나이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할복을 하고 부하로 하여금 자신의 목을 치게 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선망했던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가 그런 결말을 불러왔다는 것이 방외(邦外)의 문사인 저에게는 의외의 일입니다.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제가 한국인이라, 지극한 유미주의자가 아니라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굳이 성인의 ‘대시(大是)’가 아니더라도, 그 커다란 긍정론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그 전체로 긍정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몸으로 압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그렇게 살갑고 정겨운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질긴 목숨이 바로 그 증좌입니다. 다만, 때로 그 당연한 이치를 잠식하는 세간의 인정(人情)이 있을 뿐입니다. 그 또한 버릴 수 없는 것일 거라 여깁니다. 그것마저 긍정해야 이 세상이 진정한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로 감싸진, 우주에서 하나뿐인 지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3. 6. 9.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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