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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19. 2019

자서전을 쓰십시다

오늘 아침에 글을 쓴 자가 작가

자서전을 쓰십시다


“현실보다 더한 소설은 없다.” 소설가들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말을 실감합니다. 소설을 쓸 때마다 줄곧 되뇌어 온 말이기도 합니다. 소설은 늘 인과관계를 강요하기 때문에 그것 밖에서 이루어진 내 경험들을 안아 주지 않습니다. 살갑게 대해 주지 않습니다. 빈정대거나 무시합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랬습니다. 제가 젊어서 한때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자전적 소설쓰기를 그만둔 것도 어쩌면 그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전(自傳)을 표방하면서도 ‘있는 그대로’를 쓰지 못해 아무런 위로도, 보상도 되지 못하는 노역(勞役, 奴役)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굳이 소설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 글을 쓴 자가 바로 작가다.” 그 한 줄만 생각합니다. 저의 아침잠을 깨우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의무적으로 자판을 두드립니다. 소가진설(小家珍說), 무슨 글이든 제 손을 거쳐서 세상에 나오는 것들은 모두 저의 소설입니다. 저의 소설은 이제 장르를 불문합니다. 가급적이면 ‘있는 그대로’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로렌 아이슬리의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 책을 읽고 ‘있는 그대로’ 글쓰기에 나서기로 작심하던 때의 글을 소개합니다

.  

...그건 그렇다 치고,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로렌과 달리 아직 좀 더 예의바른 시간을 원할 수도 있었다. 스스로 정돈된 시간 속에 놓여진 삶이길 원할 수도 있는 거였다. 그들은 적당한 가식과 적당한 비굴, 적당한 타협과 적당한 공모(共謀) 속에서 인생을 상처 없이 가꾸어 나가는 것이 자신에게 요구된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런 이들에게는 로렌의 글쓰기는 완전 날벼락이다. 그런데 로렌은 오히려 그걸 ‘삶의 의미를 가지런히 해보려는 개인의 마지막 시도’라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무마한다.


“나는 이것이 눈 내리기 전 인간의 가을 풍경이라고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녹슨 심장 속 용수철이 부서지기 전에 그리고 꿈, 기억 및 그것들을 담고 있는 그 애매한 화학 영역이 회복 불가의 산산조각으로 날아가 버리기 전에 자신의 삶의 의미를 가지런히 해보려는 개인의 마지막 시도다.”(299쪽)


우리가 보기에는 ‘날벼락’인데, 그는 ‘가지런히 해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들 따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뻗대다가는 더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랑뱅이를 적시자는, 그렇게 물을 건너자는 친구를 마다하고 강변을 떠돌다가는 결국 물도 못 건너보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법이다. 엉뚱한 상상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걸 두고 입전수수(入廛垂手)라고 할 수도 있을까? 심우도(석존께서 사문유관(四門遊觀)을 통하여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보셨다. 자신은 물론이고 누구나가 다 그러하다면 삶이라는 것은 속절없는 것 아닌가, 그런 속절없음을 두고 참된 삶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닫고 유성출가(踰城出家)를 감행하셨다. 소를 찾아 떠난 것이다.)의 마지막 단계, 찾은 소도 보내고 소를 찾던 나도 보내고, 반본환원(返本還源)한 다음 다시 저잣거리로 돌아가는 단계가 입전수수라 했다. 육도중생(六道衆生)을 위해 세상으로 나오는 것, 온몸을 다 드러내고 중생과 함께 안고 뒹구는 것, 아마 그런 성자의 삶을 로렌은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생(生)은 우주가 남긴 아주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먼지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될 것인가? 그렇게 보면, 우주 안에 의미 있는 것은 없다. 있다면 우주뿐이다. 그러니, 우리에겐 무엇의 의미를 안다는 일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주의 언어를 모른다. 행여, 만에 하나, 우리가 우리 삶의 의미를 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나는 이랬다저랬다 긴가민가하는 불안한 중생이다. 뭘 가르치려 들어도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미숙아다. 안들 무슨 소용인가.” (김이듬, ‘퇴폐라뇨$&#?’, 『시와 반시』, 2005년 여름호) 
<2012. 6. 19.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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