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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20. 2019

읍참마속(泣斬馬謖)

삼국지

읍참마속(泣斬馬謖)   

  

“촉(蜀)의 제갈량(諸葛亮)은 마속(馬謖)의 재능을 아껴 유비(劉備)의 유언을 저버리면서까지 중용한다. 그러나, 마속은 제갈량의 제1차 북벌(北伐)때 위(魏)의 장합과 벌인 가정전투(街亭戰鬪)에서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자기의 얕은 생각으로 부대를 움직였다가 대패한다. 제갈량은 마속을 아끼는 마음을 억누르고 눈물을 삼키며 군율에 따라 목을 베어 군율의 엄함을 보였다.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마속전(馬謖傳)」은 당시를 이렇게 기록한다. ‘한중으로 돌아온 제갈량은 마속을 옥에 가두고 군법에 의해 그를 사형에 처했다. 제갈량은 그의 죽음을 두고 눈물을 흘렸다. 마속의 나이 그때 서른아홉이었다.’”[인터넷 검색]  

   

사실, 읍참마속(泣斬馬謖)처럼 기분 나쁜 말도 없습니다. 부림을 당하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실수 한 번 하면 죽는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디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올가미를 만들어 사용합니다. 특히 독재자들은 더 합니다. 권력을 잃는 첩경이 섣부른 후계자 양성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절대로 후계자를 만들지 않습니다. 2인자 제거 프로젝트를 상시 가동합니다. 올가미를 설치하고 누구든 그 올가미에 들어오면 ‘읍참마속’ 신세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야 늘 ‘물 좋은 권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읍참마속이라는 말에 항상 붙어 다닙니다. 그런 차에 ‘읍참마속’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을 하고 있는 책을 한 권 봤습니다. 그 내용을 조금 소개합니다.  

   

...마속을 부하로 부림에 있어서 제갈량이 유비의 말을 듣지 않는 모습이 나온다. 이는 자신의 마속을 믿는 마음이 유비의 충고보다 훨씬 굳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제갈량은 사람 볼 줄 모르며, 그런 주제에 자신의 주장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이는 자신의 눈을 믿은 것이지 마속을 믿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말만 앞서고 이론만 아는 이를 가정 싸움이라는 큰 전투에 내보내다니, 이는 제갈량이 마속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결국, 마속은 전쟁에서 패하고 제갈량에게 읍참마속을 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제갈량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마속의 죽음 이후, 패전한 전투에서 혹은 인재를 배치함에 있어서도 ‘마속만 있어서도...’라고 되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굳이 마속이란 말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제갈량도 마속을 딱 한 번 제대로 본다. 제갈량이 동생 제갈균을 생각하며

“균이 마속만큼 만이라도 됐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시키는 대로만 해서는 안 되는데...”라고 늘 균의 부족을 탓하던 제갈량. 그러나 가정의 싸움에서 마속이 진을 구축한 것을 보고받은 제갈량은 분노해서 말한다.

“차라리 균이 낫군. 균은 시키는 대로나 하지. 왜 마속은 제멋대로야?”

비록 인재난이었다고는 하지만, 제갈량의 마속 참수는 자신에 대한 징벌이기도 했다. [이형근, 『삼국지 죽이기』]     


예나제나 상사(上司)가 아랫것들을 보는 관점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①안 시켜도 알아서 잘 하는 것들, ②시키는 일만 곧잘 하는 것들, ③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 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①에 해당하는 부하나 후배를 둔 상사나 선배들은 하는 일 없이도 ‘일마다 천복(天福)’인 신세를 누립니다. 매사가 순탄합니다. 직장이 힐링 공간입니다. 그러나 ②나 ③의 아랫것들을 둔 ‘복 없는 자’들은 사는 게 하루하루가 고역입니다. 매일매일 스트레스입니다. 모든 것을 손수 기획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짜증도 수시로 내야 합니다. 마속은 분명 ①에 해당되던 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그를 총애합니다. 그런데, 한 번의 실수로(혹은 불운으로) 마속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순식간에 ①에서 ③으로 미끄러지면서 죽임을 당합니다. 인용문의 필자는 그 점을 강조합니다. 그런 가혹한 처사가 제갈공명의 자기 징벌이라는 겁니다. 마속은 그대로인데 제갈량이 그에 대한 평가를 자기 편의적인 발상(혹은 자책감)으로 좌지우지, 제멋대로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했다는 겁니다.     

물론, 그런 식의 해석과 주장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한중으로 돌아온 제갈량은 마속을 옥에 가두고 군법에 의해 그를 사형에 처했다. 제갈량은 그의 죽음을 두고 눈물을 흘렸다. 마속의 나이 그때 서른아홉이었다.”라고 끝을 맺는 마속전의 한 구절입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몇 가지의 서사적인 내용(스토리텔링)입니다. 한두 줄의 문장(文章)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것은 오래된 기록을 읽어나갈 때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될 부분입니다. 특히 뼈에다 살을 붙일 때는 지금의 시선이 지나치게 작용해서는 안 됩니다. 경전이나 사서를 읽을 때는 충분하고 또 충분할 만큼 맥락적인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읍참마속’도 일단은 전해지는 대로 당연히 그럴만한 맥락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제갈량은 자신이 아끼던 재능 있는 부하를 보다 큰 목적을 위해서 희생시켰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죽을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갈량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읍참마속은 여전히 기분 나쁜 말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능력도 한결같지가 않고요. 사람의 능력은 어떻게 때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큰 차이를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행운과 불운 속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세상사는 때에 달린 것이지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마속의 실패가 딱 그렇습니다. 그도 예상치 못한 결과입니다. 그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①에서 ③으로 미끄러지면서 죽임을 당하는 일은 아무래도 불운에 속할 일이지 자신의 능력 부재에 따른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갈공명의 ‘읍참마속’도 그에게는 한 불운이었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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