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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20. 2019

신(新) 신데렐라 콤플렉스

성숙

(신데렐라 콤플렉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얼마 전까지도 제 책상 앞에는 이런저런 좌우명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남새스러워 다 밝힐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절대 포만감을 느끼지 말 것’과 같이 잘못된 식생활 습관과 관련된 것도 있었습니다. 근자에 들어 그것들을 모두 철수시켰습니다. 최근에 있던 것이 ‘소창다명(小窓多明)’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쓴 것은 아니지만 나이 든 제자 한 사람이 보낸 카드도 한 장 걸려 있었습니다. 그 카드에는 예쁜 자전거 그림 밑에 ‘힘내세요’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제 그것들도 다 서랍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책상 앞에 무엇을 써서 붙이는 습성은 중학교 시절부터 생긴 것입니다. 중학교 2학년때였습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 볼 작정으로 앉은뱅이책상을 하나 장만했습니다. 두문불출, 하루 종일 그렇게 앉아서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아버지가 옛날 학창 시절의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습니다. 하숙집 친구였는데 ‘종시일관 목표는 일고(一高)’라고 책상 앞에 써 붙여 놓고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다는 겁니다. ‘일고’는 동경제일고등학교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었답니다. 본인은 축구 선수로 활약하면서 공부는 고만고만하게 했는데 그 친구는 오직 공부만 했다는 겁니다. 그 친구가 정작 동경의 일고를 갔는지 못 갔는지는 아버지도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도 그런 좌우명을 하나 써 붙이기를 권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終始一貫 目標는 경고’라고 써 붙였던 것입니다. ‘경고’는 한글로 썼는데 당시 명문교였던 ‘경’자로 시작되는(한자는 서로 다릅니다) 고등학교 중 한 군데를 가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목표는 성사가 되었고 그 이후로 그렇게 써 붙여 놓은 것이 그만 습관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 경험이 이를테면 스스로 ‘내적 통합’을 이룬 최초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저를 계속 붙들어 매고 있었던 같기도 합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이번 글의 제목은 <신 신데렐라 콤플렉스>이고 그 주제는 ‘성숙을 향한 투쟁’입니다. 산다는 것은 곧 성숙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투쟁’이라는 말이 붙는다는 것이 좀 생경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성숙해 가면서 살아가는데 굳이 ‘투쟁’이 왜 필요할까도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다만, 그것을 의식하는가 의식하지 못하는가의 차이와, 자신의 성숙이 때로는 남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의 차이일 뿐, 인생의 과정은 곧 성숙의 과정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자신의 경우를 보면, 제가 원래 미숙아로 태어난 탓인지, 나이가 한참 들어서야 나의 성숙이 남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것이라야 한다는 자각이 들어왔습니다. 젊어서는 그런 생각을 해 볼 엄두가 잘 나지 않았습니다. 또 말이 길어집니다. 거두절미하고 옛날이야기에서 그 ‘성숙’의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이야기들은(백설공주, 신데렐라의 고난과 승리), 사람이 자아를 획득하고 내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 나가야만 함을 널리 전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경을 견디고, 위험을 극복하며, 승리해야만 한다. 이런 방법으로만 인간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고 자신의 왕국을 차지할 수 있다. 옛이야기 속의 남녀 주인공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입사식에 비유될 수 있다. 처음 입사식에 임할 때는 순진하고 불완전한 초심자가, 마치고 나올 때에는 처음 시작할 때는 꿈도 못 꾸었던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신성한 항해를 통해서 그 사람은 보상을 얻거나 구원을 받는다. 진정한 자신이 됨으로써, 남녀 주인공들은 사랑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그런 자아 개발이 유익하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복의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행복을 얻으려면, 고립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과의 유대를 형성해야 한다. 자기의 삶이 아무리 높은 경지까지 나아갔다 하더라도, ‘그대’ 없는 ‘나’ 혼자서는 고독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옛이야기의 행복한 결말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평생 반려자와 결합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옛이야기들은 참된 자아를 성취한 후, 고립을 초월하기 위해서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백설공주』에서도 『신데렐라』에서도(그림 형제의 판본) 그들이 결혼한 후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결혼한 후 배우자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밖에 없다. 이 이야기들은 여주인공을 참된 사랑의 문턱에까지만 올려놓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참된 결합을 위해 어떤 인격적 성숙이 필요한 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완전한 의식과 유대를 성취할 기반이 마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을 할 때에 요구되는 변화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완성이 될 수가 없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와 같은 옛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옛이야기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런 옛이야기들의 주제는 주인공이 너무 매력적이라 사랑받을 만하고 또 아무리 왕자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며 완전한 성취감을 맛보려면,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백설공주나 신데렐라가 힘겹게 참된 자아를 획득하였다 할지라도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참된 자아를 확립한 동시에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행복을 느껴야만, 인간은 모든 잠재력을 성취한 완전한 인간이 된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인성의 가장 심층적인 영역에서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존재의 심층을 움직이는 변화가 다 그렇듯이, 여기에도 용기를 가지고 맞서야 하는 위험이 있으며 극복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이런 옛이야기의 메시지는, 우리가 타인과 더불어 양족 모두를 영원히 행복하게 할 친근한 유대를 맺고 싶으면, 유아적인 태도를 버리고 보다 성숙한 태도를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브루노 베텔하임(김옥순, 주옥), 『옛이야기의 매력2』, 444~446쪽]


인용문의 저자는 그런 ‘성숙에의 투쟁’을 옛이야기들은 아이들의 잠재의식에 호소한다고 말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의식적인 층위에서 그런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에게 심각한 혼란이 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수준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과업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일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에 그런 개념들이 깊이 새겨지고 나면 시간이 흘러 스스로 그 문제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는 시점에서 제대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책상 앞에 써서 붙이는 습성’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것이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직설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어서 너무 제 인생을 강요적으로(?) 꾸려오게 한 한 원인이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좀 늦었습니다. 성숙은 그렇게 목표지향적으로, 굳이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만약 ‘투쟁’이 요구된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일 뿐, 다른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 이제 책상 앞에 써서 붙일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족 한 마디.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하면 보통 <동화 속의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나듯, 여성이 일시에 자신의 인생을 화려하게 변모시켜 줄 남자를 기다리는 심리적 의존 상태>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옛이야기의 심리적 효용을 고려할 때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필요없을 만큼 덧난 자신의 성숙에 대한 기대>로 이해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보다 더 정확한 ‘신데렐라 활용법’일 것 같습니다. “『신데렐라』는 어린이를 절망감, 즉 오이디푸스적인 환멸, 거세불안, 남에게 무시당한다는 상상으로 인한 자기비하 등으로부터 끌어올려 자율성과 근면성 그리고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게 한다.”(브루노 베텔하임, 앞의 책)라는 심리적 효용의 주제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성숙’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강박을 ‘신데렐라 콤플렉스’로 부르는 게 오히려 더 적합하지 않겠는가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다른 말로는 ‘미숙아 콤플렉스’쯤 되겠고요.

<2013. 6. 20.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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