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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21. 2019

바퀴벌레는 무엇을 먹고 사나

회의 없는 신념은 악

바퀴벌레는 무엇을 먹고 사나


그놈이 바퀴벌레인 건 확실합니다. 무엇이든 회의 없는 신념은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놈의 존재에 대해 제가 문득문득 회의하는 것이 꼭 나쁘거나 그놈의 실체를 암암리에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게 맞을 겁니다.

놈을 처음 본 것은 3,4년 전이었습니다. 학교 앞 시장에서 주전부리할 것을 한 봉지 사 왔습니다. 쓸데없는 일로 바빠서 바로 봉지를 개봉하지 못하고 하루 묵혀두었습니다. 쓸데없이 책상에 찰거머리 같이 붙어서 이런 글을 써내려면 포도당이 많이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늙은 말’ 주제에 뇌를 많이 쓰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뇌 활동이 요구하는 포도당 때문에 당(糖) 조절이 필수적입니다. 간혹 오버해서 때를 놓치면 눈알이 빙빙 돌거나 찌그러집니다. 내 눈 안에서 그런 지진 현상 비슷한, 정확히 때를 예측할 수 없는 파괴적인 자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게 신기합니다(이제는 슬프거나 실망스럽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주전부리를 끊을 수가 없는 일인데, 그날도 전날 사 두었던 것을 냉장고에 들어갈 놈은 냉장고로, 밖에 둘 것은 바깥으로 각각 제 위치를 찾아서 배치하려는 중이었습니다. 제가 봉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 순간, 그때 그놈이 그 검은 봉지 안에서 밖으로 튀어나온 것입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새끼 손가락만한 것이 튀어나왔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 눈은 놈의 동선(動線)을 추적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세면대 뒤쪽으로 사라진 것 같기도 했고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도 했습니다. 그렇게 내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아마 종내는 연구실 벽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책장, 저 우울한 성곽 뒤로 숨었을 것입니다.


바퀴벌레와 함께 동거하는 일이 때로는 아주 기분 나쁜 일이 되곤 한다는 것을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양치질을 하려고 칫솔을 꺼낼 때, 양치질을 하고 입안을 헹구려고 컵을 들 때, 커피를 한 잔 하려고 커피잔과 티스푼을 만질 때, 놈이 자신의 그 더러운 털 달린 다리로, 혹은 온갖 악취와 함께하는 입으로, 그것들을 마구 유린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들을 모두 뚜껑 달린 케이스 안에 보관해야 한다는 강박이 온몸을 휩싸고 돌 때의 몸서리치는 불쾌감을 한 번 연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바퀴벌레 잡는 장치를 곳곳에 설치하고, 내 입과 손이 닿는 모든 기물에 잠금 장치를 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에(몸서리치는!) 제가 반응한 방식이 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강박증 환자가 하는 짓거리치곤 너무 치졸한 것이었습니다. 제 주전부리의 일부를 놈에게 노출시켜 놈의 존재를 한 번 확인해보자는 우행(愚行)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놈도 생물일진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배고프면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별 수 없이 먹을 것을 찾아서 밖으로 나다녀야 할 것이고, 제가 방을 비운 사이의 그 캄캄한 공간 안에서, 아무런 훼방꾼도 없는 그 암흑의 공간 속에서 의기양양 더듬이를 거침없이 놀려마지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당연히 이 단것들을 찾아내는 즉시 먹어치울 것이다, 최소한 이빨자국이라도 남길 것이다, 내 너의 흔적을 발견하기만 하면 이 방을 발칵 뒤집어서라도 너를 박멸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빵조각이든 비스켓 조각이든 놈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먹기 좋게 진열해 두고 퇴근을 했던 것입니다. 일종의 함정 수사였던 셈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틀림없이 놈이 어떤 식으로라도 흔적을 남길 것이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생각과는 달리, 하루 이틀 멀쩡히 그대로인 채 주인을 맞는 그 미끼들을 보면서도 단 한 번도 놈의 존재를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놈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놈은 끝까지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그것들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의도의 오류’ 속에서 방치된 미끼들, 그 수치와 오욕의 덩어리들을 제 입 안으로 집어넣으면서 저는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그제서야 놈이 바퀴벌레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런 졸렬한 함정에 빠질 자라면 그는 이미 바퀴벌레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저 시시한 애완 벌레이거나 모험심을 자극하는 작고 귀여운 해충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작고 시시한 미물(微物)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인간들이 함부로 밟고 다니는 그런 물적(物的)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인간 위에서 구름처럼 떠다니는 영적(靈的)인 존재였습니다. 저 높고 무거운 책장 뒤에서 자기 몸으로 배출해낸 수천 수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일거수일투족, 매일같이 나를 지켜보면서도 미동도 없이 천년을 버틸, 은밀한, 그리고 위대한, 바퀴벌레였던 것입니다. 그런 깨달음이 또 문득, 이렇게 찰거머리 같이, 아니 바퀴벌레 같이, 책상에 붙어서, 아니 책장 뒤에 숨어서, 이런 글이나 쓰고 있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불현듯 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위대한 바퀴벌레!).


그레이엄 그린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따금 나는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의 고유한 광기와 멜랑콜리, 돌연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중략> 이 책의 첫 번째 목적은 공감이며 두 번째 목적은 질서이다(사실 내겐 이 두 번째 목적을 달성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다). 되는 대로 모아 놓은 일화들에서 끌어낸 일반화에 의거한 질서가 아닌 최대한 경험론에 기초한 질서. [앤드류 솔로몬(민승남), 『한낮의 우울』, 18~19쪽]


앤드류 솔로몬의 ‘최대한 경험론에 기초한 질서’ 운운이 눈물 나게 반갑기도 했고, 그레이엄 그린이 했다는 말, 예술적 행위의 심리(학)적 효용을 강조하는 약간 과장된 어조의 말이 작지 않은 위로가 되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그들과 나누는 ‘공감’이 내 방 안의 바퀴벌레를 방 밖으로 추방할 수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엄살도 짐작도 아닙니다. 실증이 뒤따르는 고백입니다. 그 ‘공감’ 뒤로 숨는 또 한 마리의 검은 바퀴벌레를, 지금 이 순간에도, 제 찌그러진 안구가, 점심을 굶은 탓에 떨어진 당기(糖氣) 때문이지 싶은, 그 안압(眼壓)이 떨어질 때마다 돌연히 찾아오는 불구의 상태가, 흘낏거리며 똑똑하게 확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여전히 제겐 궁금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바퀴벌레는 무엇을 먹고 사나?’라는 의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먹잇감을 매일같이 살포했음에도 불구하고 3,4년 동안이나 일절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있는 그 바퀴벌레들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사는지가 정말 궁금할 따름인 것입니다.<2013.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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