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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04. 2019

쇠를 쳐야

영화, 혈의 누

쇠를 쳐야     


백성들에게는 권력자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제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스리는 권력은 다스리는 대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파쇼화되기 마련입니다. 그 과정에서 탐심(貪心)에 물든 권력의 하수꾼들이 백성들의 땀과 피를 착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들이 바로 백성의 원수(怨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신문고보다 더 직접적인 ‘민중의 소리’였습니다. 신문고는 중앙관원을 반드시 거쳐야 두드릴 수 있었지만 격쟁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징, 북, 장구, 꽹과리 등을 쳐서 왕에게 직접 호소할 기회를 갖는 민중 본위의 제도였습니다. 흑산도 주민 김이수(1756~1805)가 1791년 엄동설한에 격쟁으로 왕의 어가를 가로 막은 일은 꽤나 유명합니다. ‘민중의 소리’가 권력에 제동을 건 좋은 사례로 자주 인용됩니다. 

    

...서남해역에서 종이를 만드는 원료인 닥나무가 흑산도와 안면도에만 유일하게 분포했다. 그래서 섬 주민들은 누대로 종이를 만들어 중앙관부에 상납해 왔다. 그런데 종이 상납은 절해고도 섬 주민들에게 결코 가벼운 부역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섬 주민들은 닥나무를 채취할 수는 있었지만, 이것을 이용해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이 제작은 영암의 도갑사 승려들을 섬으로 초대해서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는 섬 주민과 승려의 분업으로 만들어졌지만, 소요되는 경비는 모두 흑산도 주민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흑산도에 닥나무가 절종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 섬 주민은 닥나무를 구하러 육지로 나와야 했고, 현지에서 종이를 만들어 중앙에 상납했기 때문에 체류비 또한 덤이었다. 그 결과 섬 주민의 종이세 부담은 날로 늘어났다. 이런 사정을 섬 주민들은 흑산도진에 정소했고 그 다음에 상급관부인 우수영, 나주목, 전라감영에 민원을 제기했다. 마침내 전라감사가 중앙관부에 시정을 요구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급기야 섬 주민 김이수가 한양 천리 길을 달려가서 정조에게 격쟁을 올린 것이다. [김경옥, 「섬 주민 김이수, 한양 한복판에서 正祖의 어가를 가로막다」(교수신문 2012. 7. 2)]     


김이수가 꽹과리를 쳐서 현릉원(사도세자의 능) 행차에서 돌아오는 정조의 어가를 멈추게 한 것은 그의 나이 35세였습니다. 한창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더 그랬을 겁니다. 한 몫 하는 한 집안과 마을의 든든한 기둥이었을 겁니다. 모르긴 해도 절해고도 흑산도에서 꽹과리를 지고 뭍에 오르던 그의 심사는 무척 비장했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한양으로 향하던 엄동설한의 천리 길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먼 길을 걸어내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었을 겁니다. 그런 고역은 차치하고서라도 정작 어려운 일은 권력에 맞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른 소리라 해도 권력의 잘못을 질타하는 일은 예나제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디 권력을 가진 자들은 금수(禽獸)와 같아서 백성들 보기를 한갓 먹잇감으로밖에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가 부르면 먹잇감을 앞에 두고 어르고 놀다가 배가 고파지면 냉큼 잡아먹는 것이 권력입니다. 그래서 권력에 맞선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서 민원이 제기되고 정식으로 각하된 사안이었습니다. 그것을 한 민초의 요구로 왕이 다시 살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는 그 어떤 보장도 없었습니다. 만약 사리에 어긋난 무모한 도발이었다는 판정을 받게 되면 그 후에 닥칠 엄청난 후폭풍을 혼자서 다 감당해야 하는 외길 행보였습니다. 잘 되면 향토의 영웅이 되겠지만 못되면 혼자서 다 뒤집어쓰고 온갖 고초를 다 겪어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게 ‘김이수의 격쟁’이었습니다. 그런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에 그는 수없이 많은 불면의 밤을 겪었어야 했을 겁니다. 다행히 결과는 좋았습니다. 정조 임금은 좌의정 체제공에게 명해서 진상을 살펴보라고 했고, 체제공은 4개월여의 현장 조사를 통해 흑산도 주민들에게 부과된 사리에 어긋난 종이 세 부역을 철폐토록 하였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나, 더 큰 감동은 그 후 흑산도 주민들이 김이수에게 행한 보은의 의리행사입니다.     


...이로서 흑산도 주민의 종이세가 혁파되었다. 이에 섬 주민들은 격쟁을 올린 김이수에게 흑산도 인근 해상의 중죽도 어장을 포상으로 지급했다. 또 김이수가 세상을 떠나자, 주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김이수에 대한 섬 주민의 신의가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18세기 흑산도 주민 김이수는 섬사람의 절박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정조를 만났다. 평범한 백성이 단지 쇠를 쳐서 어가 행렬을 멈춰 세운 것이다. 이 사건은 역사상 왕과 백성의 가장 극적인 만남으로 기억된다.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천리 길을 달려간 섬 주민,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격쟁을 허용한 정조의 여론정치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김경옥, 위의 글]     


김이수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문득 언젠가 본 『혈의 누』(김대승, 2005)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 영화의 배경이 흑산도 주민들의 종이 부역과 매우 흡사합니다. 영화는 외딴 섬 동화도에서 일어나는, 제지소를 둘러싼 원인 모를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그 사건의 범인과 수사관 사이에는 선대부터 맺어진 악연이 존재합니다). 그 영화에서는 주민들에게 성심껏 은사를 베푼 한 서민 영웅(제지소의 원주인이었던 강도주)에게 ‘몸과 마음의 빚 부담’에서 벗어나고픈 섬 주민들의 ‘집단 배신’이 마치 원죄처럼 강렬하게 부각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지가 찢겨져 죽는 서민 영웅 강도주를 섬사람들은 쉬쉬하며 외면합니다. 누구도 그를 위해 증언을 하거나 ‘격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을 이용하는 권력의 교활함도 중요한 스토리라인을 형성합니다. 제지소를 약탈하려는 자와 빚을 탕감 받으려는 자들의 야비하고 비굴한 야합이 이루어집니다. 그 서민 영웅이 죽고 하늘에서는 혈우(血雨)가 내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미쳐갑니다. 서로를 죽입니다.

어쩌면 ‘김이수의 격쟁’은 이제 신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혈의 누』가 엄연한 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대난망이라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그러나,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도 듭니다. 홀로 나서서 ‘쇠를 쳐서’ 임금의 행렬을 멈춘 이에게 신의로 대한 엄연한 흑산도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아직 포기하기엔 너무 이릅니다. 동화도는 한갓 영화일 뿐입니다만 흑산도는 엄연한 역사입니다. 

<2012. 7. 4.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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