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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21. 2019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데미안>과 <마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상처받은 소녀를 구해내기 위해 그 소녀의 엄마가 되기로 한 여자의 이야기 드라마 <마더>(tvN, 2018)는 “모성(母性)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습니다. 자녀에게 깊은 상처를 안기는(심지어 살해의 의도까지 품는) 못난 진짜 어머니(親母)와 그런 아이들을 살리는 잘난 가짜 어머니(義母)의 대립은 소위 ‘계모(繼母) 악인(惡人)형 옛날이야기’에 익숙해져 있는 일반 독서 대중들의 안일한 상상력을 여지없이 부셔 버립니다. “<마더> 안에 다 있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될 정도로 인간의 심층심리를 잘 분석하고 형상화한 드라마였습니다. 남녀 불문하고 자식을 둔 부모라면 누구나 감동적으로 감상했던 드라마였습니다. 특히 저 같이 나이 어려서 어머니와 사별한 아이들(아직도 제 안에는 그 아이가 엄연한 심리적 주체로 남아 있습니다)에게는 ‘눈물의 드라마’, ‘회한의 드라마’, ‘교육의 드라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프로이트와 융의 어머니는 그들의 어머니(母性)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과 상당히 상반된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를테면 따뜻한 모성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프로이트는 모성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았다면 따듯한 모성에 대한 결핍감이 깊었던 융에게는 모성에 대한 이상화가 그의 소견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식입니다. 과연 그런지 두 사람의 전기적 사실이 자세하게 비교된 책이 있다면 꼭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융의 어머니 신화(융 학설에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높아서 그렇게 부르고 싶습니다)를 반영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보면 이상화된 모성의 한 편린을 볼 수 있습니다. 헤세 식 <마더>를 볼 수 있습니다.   

       

싱클레어에게 에바 부인(데미안의 어머니)은 ‘이상적인 어머니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장엄한 대상 이미지’로서, 성별과 나이를 초월해서, 싱클레어의 동일시(identification)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였습니다. 싱클레어는 그녀의 ‘아들-연인(son-lover)’이 되고 싶은 열망에 휩싸입니다(이른바 ‘마마보이’는 자신의 내면에 고착된 위대한 어머니와의 결별을 감행하지 못하는 남자-아들 연인-입니다. 이 이상화된 어머니상은 불패의 강적이라 그 어떤 여인도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실존의 어머니가 살아있고 죽어 없어지고는 아무런 변수가 되지 못합니다). 『데미안』에서 가장 신비로운 내용이 기술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는 이 부분의 의미가 쉽게 와 닿지 않았습니다. 지금 회고해 본다면 초현실주의(신심리주의) 소설, 혹은 판타지 소설인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 같습니다. 문면(文面)의 스토리를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정서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쉽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불신감 혹은 저항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내용이었습니다.

     

「싱클레어죠. 금방 알아봤어요. 어서 오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깊고 따뜻했다. 나는 감미로운 포도주처럼 그 목소리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이제 눈을 들어 그녀의 고요한 얼굴을,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검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신선하고 성숙한 입을, 자유롭고 당당한, 그 표적을 지닌 이마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 말하며 두 손에 키스하였다. 「제 모든 생애는 늘 길 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가 어머니처럼 미소지었다.

「결코 집으로 아주 돌아오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친한 길들이 서로 만나는 곳, 거기서는 온 세계가 잠깐 고향처럼 보이지요.」

그녀가 말하는 것은 그녀에게로 오는 길에 느낀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 또 그녀의 말은 아들과 매우 닮았으면서도 전혀 달랐다. 모든 것이 더 성숙하고, 더 따뜻하고, 더 자명했다. 그러나 막스가 예전에 그 누구에게도 소년의 인상을 주지 않았던 것과 똑같이 그의 어머니는 전혀 장성한 아들을 둔 어머니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 주위로 감도는 숨결은 그토록 젊고 감미로웠다. 그녀의 금빛 도는 피부는 그렇게 팽팽하고 주름이 없었다. 입은 그렇게 꽃피고 있었다. 내 꿈속에서보다도 당당하게 그녀는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 곁에 있음은 사랑의 행복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성취였다. <중략>

어떻게 되어가든 나는 행복했다. 세상에서 이 여성을 안다는 것이, 그 목소리에 젖어든다는 것이, 그녀 곁에서 숨쉰다는 것이, 그녀가 내게 어머니가 되든, 연인이 되든, 여신이 되든, 그녀가 거기 있기만 하다면! 나의 길이 그녀의 길에 가깝기만 하다면!

그녀는 나의 매 그림을 가리켰다.

「이 그림을 받았을 때만큼 우리 막스가 기뻐한 적은 없어요」 그녀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나도 그렇구요. 우린 당신을 기다렸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이 왔을 때, 당신이 우리들에게로 오는 도중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당신이 어린 소년이었을 때, 싱클레어, 그때 어느 날 내 아들이 학교에서 오더니 말했지요. 이마에 표적을 지닌 소년이 하나 있어. 그애는 분명 내 친구가 될거야, 라고요. 그것이 당신이었어요. 사는 게 쉽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우린 당신을 믿었답니다. 한 번은 방학에 집에 왔을 때 다시 막스와 만났지요. 열여섯 살 때쯤이었을 겁니다. 막스가 나한테 그 이야길 했어요」

내가 중단시켰다. 「오, 형이 그런 말을 해드리다니! 그대는 제가 가장 비참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요, 막스가 나한테 이러더군요. 지금 싱클레어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 닥쳐 있어요. 그애는 다시 한 번 공동체 속으로 도피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어요. 심지어 술집 단골이 되었어요.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그의 표적이 가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 표적이 아무도 모르게 그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라구요. 그렇지 않았나요?」

「오 그래요, 그랬어요, 꼭 그랬어요. 그 다음에 저는 베아트리체를 발견했고 그 다음에 마침내 다시 저를 제 자신에게로 이끄는 인도자가 왔지요. 그 이름은 피스토리우스예요. 그때야 저는 왜 저의 소년 시절이 그토록 막스 형과 결합되었는지, 왜 제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머니, 아니 어머니, 전 당시에 자주 생각했어요, 죽어야겠다고요. 그 길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녀가 바람처럼 가볍게 손으로 내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그건 늘 어려워요, 태어나는 것은요. 아시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았던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헤르만 헤세(전영애), 『데미안』 「에바 부인」, 188~190쪽]     


에바 부인과 그녀의 아들 막스 데미안은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외모와 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싱클레어에게는 그렇게 인식됩니다.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에게서 어머니와 연인과 여신을 봅니다. 내면에 고착된 이상적인 여인상(과도한 에너지가 부과된) 그 모든 것을 에바 부인에게 투사합니다. 그녀와의 합일을 통해서 완전한 우주의 탄생을 꿈꿉니다.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위대한 어머니와 아들-연인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로보로스로의 귀환’이 연상되는 대목입니다. 헤세는 내면의 그런 무의식적 충동을, 싱클레어라는 한 작은 탐험가(어린 자아)가 에바 부인이라는 미지의 대륙(위대한 어머니)을 탐색하도록 함으로써, 긍정적 에너지로 변환 시키려고(의식화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노력’들이 이해하기 힘든 모호하고 추상적인 진술들을 만들어내게 합니다. 나이가 들어 ‘과거’가 있는 존재가 된 이제야 비로소 이 대목의 내용이 제 귀에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은 바로 이 에바 부인이었던 것입니다. 데미안도, 싱클레어도 아닌 이 에바 부인이야말로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헤르만 헤세의 주인공, 저의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2013. 7. 21.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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