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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22. 2019

작가의 가명과 이마의 표적

에밀 싱클레어

작가의 가명(假名), 혹은 이마의 표적(標的)  

   

몇 년 전에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이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한 사실이 알려져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남자 이름으로 『더 쿠쿠스 콜링(The Cuckoo’s Calling)』이라는 추리소설을 발표했다는 겁니다. 독자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책이 롤링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수 시간 만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야단법석을 앞에 두고 롤링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로버트 갤브레이스로 해방감을 맛봤다. 이 비밀을 더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다.”

작가가 다른 이름을 써서 작품을 발표하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비밀’을 누리며 만족감을 가진다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작품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자 하는 창작의 세계에서는 그런 ‘이름 바꾸기’가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살아온 이름은 검은 테두리가 쳐진 그림처럼 늘 어떤 ‘선명한 윤곽’ 안에서 머물기만을 요구받습니다. 작가는 그런 태생적인 제약과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이들이 작가가 되고요. 이름 때문에 자신의 상상력이 제한을 받는다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그래서 새 이름으로 도전합니다. 새 이름으로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도 그런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도전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각 장별로 음미하고 있는 성장소설 『데미안』이 바로 그런 새로운 도전의 소산입니다.  

   

...『데미안』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 씌어지고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년에 출판되었다. 당시에 이미 작가로서 유명했던 헤르만 헤세(1877~1962)는 이 작품을 가명으로 발표했다. 작품성만으로 평가받아 보고 싶어서였다. 그 결과 에밀 싱클레어라는 유령 작가가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폰타네상의 수상자로 지명되었다(헤세는 이 상을 사양하였다). 그사이 눈밝은 독문학자가 문체 분석을 통하여 『데미안』이 헤세의 작품이라고 밝혀내기도 했다.

자아의 삶을 추구하는 한 젊음의 통과의례 기록인 이 책은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라는 모토를 앞세운 짧은 철학적 성찰로 시작된다. 이 책에서 헤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며 누구나 나름으로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소중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전언은 이 소중한, 단 한 번뿐인 인간의 목숨이 총알 하나로 무더기로 소멸되는 전쟁의 충격 속에서 쓴 것이어서 더 더욱 절실함이 배어 있다. [헤르만 헤세(전영애), 『데미안』 「작품 소개」, 223~224쪽]     


헤세가 싱클레어라는 탐색 영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는,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나를 찾아가는 길> 중의 하나였습니다. 나이 육십이 넘어, 한 번의 인생을 거진 다 살아본 입장에서 볼 때, 헤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의 <나>에 대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나>에 대한 이야기가 맞다면 그 <나>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나>일 것입니다. 작품 속에서 ‘이마에 표적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는 아주 소수의 인간들만이 그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헤세가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쓰면서) 가명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와 관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 같은, 이마에 아무런 표적이 없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던 겁니다.     

‘이마의 표적’으로 유명한 것은 부처상의 백호(白毫)일 것입니다. 부처상의 이마에 있는 보석 같은 점(털)은 아즈나 차크라라고 하는 것으로 우리 두뇌의 송과선에 있는 영적인 능력과 통하는 통로라고 보면 됩니다. 흔히 영안이라고 하는 것으로 텔레파시, 투시, 미래예언, 과거투사 등으로 부처님은 3생을 관하여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능력이 발달한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Daum 블로그 '靈知(神秘)주의']     

데미안과 에바부인이 동양적인 선인(仙人)의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는 부분이 동양인인 저에게는 아주 낯섭니다. 데미안이 일종의 ‘유체이탈’을 행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더더욱 낯섭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도 마찬가집니다. ‘압락사스’를 ‘도(道)’, 혹은 ‘전일적 사랑’으로 읽고 싶은 충동을 제어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과적으로 『데미안』은 동양사상으로 서양의 기독교적 세계관(도그마)에 하나의 충격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싱클레어가 자신의 이마에도 데미안과 한 가지로 표적이 나 있다라고 아무리 강변한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서양에서는 아직까지 그런 ‘이마의 표적’을 보여준 인간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자신의 알려진 이름을 거부하고 새 이름을 자신의 책 위에 새겨 넣고 싶어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이마의 표적’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을 팔아 돈을 벌고 이름을 날린다고 해서 ‘이마의 표적’이 절로 생기지는 않습니다. 싱클레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검은 거울>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22쪽).   

  

사족 한 마디. 한 동안 글을 쓰지 못하다가 새로이 글쓰기를 시작한 작가들에게도 ‘이름 바꾸어 달기’의 갈망이 클 것이라 생각됩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욕망이 항상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입니다.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은 그런 작가들에게도 그대로 통용됩니다. “오늘 아침 글을 쓴 자가 작가다.”라는 말을 곱씹으며 절치부심합니다. 한 번 ‘비밀’을 엿본 자들은 그것으로 이미 이마 위에 지워지지 않는 표적이 하나 새겨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를 잊어도 그는 세상을 잊지 않습니다. 그가 그를 잊은 세상에 다시 자기를 드러내고 세상이 그를 새 이름으로, 낯선 자로, 새롭게 받아줄 때를 그는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이 흐릿해진 자신의 ‘이마 위의 표적’을 다시 도렷하게 해 줄 것을 믿습니다. 그게 이마 위의 표적을 잃지 않고 버티는 작가의 운명일 것입니다. 

<2013. 7. 22.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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