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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24. 2019

자부와 수치

네가 가진 상황이 너 자신임을 알라

                                                                                                                                                                                                                                                                                   

자부와 수치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가장 불편하고 자존심 상했던 일이 직장에서 겪는 ‘체면 없는 것들’과의 공존이었습니다. 제가 겪는 그런 느낌이 제가 속한 ‘물’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해서 한편으로 더 속이 상했습니다. "네가 가진 상황이 곧 너 자신임을 알라"라는 말이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 싫든 좋든 자기 주변에 놓인 것들이 결국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긴 학창 생활 중에도 그런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입 초기의 일입니다. 1학년 때 교양과정부 학생회장에 출마한 적이 있었는데 그 선거판이 가관이었습니다. 선거관리위원이기도 했던 체육과 상급생 한 명이 자기 과 후배들에게 투표용지를 두 장씩 주어서 부정 선거를 하게 했습니다. 세 명의 후보 중 한 사람이었던 자기 과 후배에게 두 장씩 표를 찍게 한 것이었습니다. 개표가 끝난 후 2위 득표자 측에 의해 그 사실이 폭로가 되었습니다. 후보자별 득표수의 총합과 선거인 명부상의 투표자 수를 대조해 보니 과연 40표 정도가 차이가 났습니다. 당연히 선거는 무효가 되었습니다. 40명의 유령 투표자가 확인되었는데 1위 득표자와 2위 득표자의 차이가 18표였습니다(전체 유권자는 1500여 명). 부정 투표의 당사자였던 후보자는 표 차가 많이 벌어지는 3위에 그쳤지만 어쨌든 당락에 영향을 미치는 수치라 재선거를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1위 득표자였던 저로서는 그 상황이 참 불편했습니다. 부정 선거 자체도 문제지만,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2위 측에서 보인 태도가 너무 가관이었습니다. 자신들이 1위가 되면 그냥 넘어가고 만약 2위나 3위가 되면 이 사실을 미끼로 모종의 ‘협상’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1위가 되자 ‘총무부장 포함해서 몇 자리’ 하는 식으로 ‘영혼을 팔아라’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그렇게는 안 되겠다고 말하자 바로 앞으로 뛰어나가서 ‘부정 선거다!’라고 외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고작 열아홉 살인 아이들이 할 수 있는 행태는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재선거에서는 표 차가 더 벌어져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습니다. 부정 선거를 저지른 쪽에도 가벼운 처벌이 내려지는 선에서 무마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학창 시절이 대체로 무난했습니다. 학도호국단이라는 것이 생겨서 아예 그쪽과는 담을 쌓고 살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덕에 평생 밥벌이가 되고 있는(안정적인?) 문학 쪽으로 일찍 길을 틀 수가 있었지 싶습니다. ‘체면 없는 것들과의 공존’도 더 이상 감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저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는 ‘체면 없는 것들’과는 반드시 정면대결, 이기든 지든 끝을 보아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영혼을 파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나이 들면서 느끼는 일상(직장이나 교우관계)에서의 불편은 옛날의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른바 ‘문명(文明)’의 소외에서 느껴지는 불편이 더 큽니다. 예전처럼 ‘체면 없는 것들과의 공존’에서 느껴야 했던 자비감(自卑感)은 없습니다. 소싯적에 깨친 바도 있기도 하고, 또 저도 이제는 체면 깎이는 일에 나름대로 능숙해진 탓이라 여깁니다. 다만 ‘반문명적인 것들’과는 여태 반목하고 있습니다. 저는 문명적인 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떠받치는 주요한 기둥 중의 하나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명(文明)’을 사전적 의미로만 받아들이는 비상식적인 태도에는 내내 못마땅합니다. 인터넷 사전을 보면 ‘문명(文明)’이란 말을 ‘인지(人智)가 발달해서 살기에 편리, 편안해진 상태’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 슬그머니 불평지기가 돋습니다. 그 말 안에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일체의 회고나 전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존중해야만 하는 ‘상식’ 중의 하나가 결락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편리, 편안이 문제가 아니라 존엄이 문제라는 것, 그것이 제1의 상식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듭니다. 문명 세계는 ‘인지(人智)가 발달해서 살기에 편리, 편안해지고 인간 상호 간 존엄 상태가 유지되는 상태’라고 정의되어야 할 것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려 봅니다. 


회고 : 한 동안 나는 고조할머니에 대해 글을 써왔다. 나는 고조할머니의 생애와 노예제도의 의미를 모든 말과 대화와 심지어 나의 상거래 계약 수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보았다. 나는 고조할머니에 대해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해왔기 때문에 이토록 끈질기게 가문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저 고집스럽게 가문의 뿌리를 추적해 들어가 장자상속제가 만들어놓은 모든 것 속에서 뭔가 특별하고 다르고 독특한 유산을 찾고자 하는 것일까? 
나는 내 탐색이 그저 고집스러운 탐닉이 아니라, 역사의 면밀한 탐색에서 비껴간 것들, 간과되고 감추어졌던 것을 재포착하는 유용성에 근거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수많은 흑인들처럼, 나는 자신을 역사 속에 뿌리박고 과거 속에 존재하고 미래로 계속되는, 중대하고도 발전적인 존재로서 시간의 흐름 속에 위치시키려고 애써왔다. 기록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 지속되기 힘들고, 쉽게 역사 밖으로 떼어져 나가고, 내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다시 쓰려는 사람들의 손에 너무도 위험스럽게 놀아날 수 있다.
외가 쪽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나의 고조할머니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이름은 소피(Sophie)였고 테네시 주에 살았다. 1850년에 그녀는 열두 살이었다. 그녀는 열한 살 때 오스틴 밀러(Austin Miller)라는 백인 변호사에게 팔려갔고 그 남자에 의해 곧 임신되었다. 그녀는 나의 증조할머니 매리(Mary)를 낳았고 증조할머니는 하녀로 키워지도록 곧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나는 고조할머니 소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더 알지 못한다. (그녀는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흑인 미혼모로서 또 한 명의 십 대 임신의 통계 수치를 더했지만, 이름도 갖지 못한 익명 상태에서 고통을 겪었다.) 내가 법학대학원에 가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오스틴 밀러에 대해서 무엇을 들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개학하기 바로 하루 전에 어머니는 신념이 깃든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밀러 집안은 변호사였지. 그래서 네 피 안에는 그게 흐르고 있단다.” 어머니가 나는 법학대학원에서 두려워할 게 아무것도 없고 법은 ‘내 피 안에’ 들어 있다고 했을 때, 매우 복잡한 의미로 말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녀는 도전적으로 그 말을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판사이므로 어느 누구도 나를 열등감 느끼게 만들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어머니는 내가 인정받지 못하고 빼앗긴 본래의 권리를 되찾아서 그것을 힘과 자신감의 근원으로 사용하기를 원했다. 동시에 어머니는 나의 또 다른 부분의 강탈자인 나의 한 부분을 내가 나 자신으로 인정하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무력하고 상처입기 쉽다고 느껴지며 더욱이 그게 사실이기도 한, 내가 투표권도 없는 조그만 검둥이 소녀임을 부인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어머니는 내가 자신을 역할 모델로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셨다. 어머니는 하버드(Harvard)가 아닌 자신의 면모를 낮게 평가하고, 굳건하고 능력 있고 서구적인 자신의 면모에 내 꿈을 재집중할 것을 요구하셨다. 어머니는 외롭고 검고 겁탈당한 자신의 여성적인 부분을 숨기고 절망적이기보다는 냉정한 자아, 여성적이라기보다는 남성적인 자아인, 능력 있는 자아의 투영으로서 나를 부추겼다.
나는 핏줄의 비밀을 어머니가 나에게 물려준 자부심과 수치심 둘 다로 받아들이고서 하버드의 환경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나 자신이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소설 『연인(The Lover)』에서 묘사한 상황에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살아야만 한다는 근본적인 수치심 속에 하나이다. 우리 공통의 운명의 핵심은 우리는 우리 어머니의 자식들, 즉 사회에 의해 살해당한 죄 없는 생명의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 속에 빠뜨린 사회 편에 서 있다. 그토록 사랑이 가득하고 진실되던 어머니에게 사회가 했던 짓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한다.”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빼앗겼던 권리를 재주장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 표현이 담고 있는 충만한 의미에서 자아 소유란 자아 인식의 동반자다. 그러나 나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내쫓기게 된 가문에의 소속을 스스로 주장한다는 것은 매우 괴로운 패러독스이다. [패트리셔 J. 윌리엄즈(이선주 옮김), 「재산 품목이 된 존재」 중에서]


인간이 ‘자부심’만으로 무장(武裝)되어 있을 때, 일반적으로 타자의 존엄에 대해서 무심해지기가 쉽습니다. 어쩌면 윗글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자부심과 수치심의 공존’이 대다수 우리 사회의 ‘성공한 자들’에게 요구되는 상식적인 심리적 태도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자신의 수치를 아는 일, 그것이 존엄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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