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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ug 02. 2019

겉으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양을 취하지만

말하기의 동기

겉으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양을 취하지만     

조직생활을 하다보면 꼭 한두 명, 주변 사람들을 이간질해 싸움을 붙이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겉으로는 늘 친절을 베풀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양을 취하지만 속은 영락없는 ‘굶주린 늑대’입니다. 조직 내의 각종 불화에 그의 ‘늑대 심보’가 개입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재주도 타고나는 것이어서 속는 사람 입장에서는 늘 감쪽같습니다. 속고 나서야, 물이 엎질러진 다음에야, 조직 전체에 미친 화(禍)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의 존재를, 그들의 악성(惡性)을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가장 잘 하는 짓이 자기에게 득이 되는 일을 위해서 공연히 남을 욕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흘리는 듯한 포즈로 누군가의 분노를 부추기는 일입니다. 그렇게 싸움을 붙이기 위해 깍다귀처럼 여기저기 날아다닙니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범죄행위’가 발각이 나더라도 “제가 뭐 잘못한 일이라도 있슈?”라고 시치미를 뗍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얼굴빛을 고치고는 곧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그런 이들 때문에, 겉은 멀쩡하지만, 사실은 속이 곪아터져서 아주 아비규환 상태가 되어 있는 조직도 여러 곳 봤습니다.   

  

서론이 좀 길어졌습니다.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세간에서 나도는 이야기들의 동기(動機)’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위해서 이 자리에서 동원될 개념들은 인식 관심 세 가지(기술적, 실천적, 해방적)와 코드 세 가지(논리적, 사회적, 심미적) 등입니다. 그것들은 철학하는 하버마스와 기호학 하는 퀴로드가 말한 것인데 지금은 거의 상식(常識)적인 용어가 된 것들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기술적/논리적’, ‘실천적/사회적’, ‘해방적/심미적’으로 묶여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개념들로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의 본색(本色)에 대해 한 번 ‘스토리텔링’을 해 보겠습니다.   

  

어떤 이야기라도 그것을 이야기하는 이의 ‘목적(목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글쓰기는 언제나(戰場에서는) 뜻을 먼저 세우고(장수가) 글자나 구절을 나열하는(병사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적(목표)을 제대로 구현하는 글쓰기인가 아닌가(적국-제목-을 이기는 전쟁인가 아닌가)는 그 다음 문제이겠지요. 일단 제대로 된 장수와 병사라는 판단이 든다면 그들이 전개하는 전술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움직이는 전략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심청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심청전(심청가)』은 해방적 인식관심에 의해서 심미적 코드에 입각한 글쓰기(노래하기)가 이루어진 예가 되겠습니다. 이른바 예술적 장르 인식에 따른 창작이 먼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념적인 프로파겐다는 그 다음입니다. 『심청전』에서 강조되는 유교적 효의 주제는 예술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기생충인 것입니다. 실천적 인식관심이 자신의 숙주로 해방적 인식관심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그 시대에 가장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문제(의식, 무의식적으로), 혹은 트라우마가 되고 있는 인신매매나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중심 소재로 차용한 『심청전』은 실천적 인식관심이 기생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이야기였습니다. 효(孝)라는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그 모든 상처의 치유책이 될 것이라는 그럴듯한 ‘이야기의 결말’을 만들어낼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교 사회였던 당시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심미적 코드에 사회적 코드가 기생하게 됩니다. 물론 독자들은 심미적 코드에 기생하는 사회적 코드의 극단화된 모습(가난 탓으로 죽은 심청이가 효를 통해서 다시 살아 최고도의 신분상승을 이룬다는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는 이중적 태도를 취합니다. 믿지도 않거니와 덮어놓고 배제하지도 않습니다(사람들이 익숙한 권위에 반응하는 태도와도 일치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이야기의 동기(動機)가 ‘위로’에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심청전』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전개되는 사건들에 대해서 기술적(記述的) 인식 관심이나 논리적 코드로 접근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 접근, 독서행위는 ‘이야기의 동기’을 아예 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오독이 됩니다. 학생들에게 ‘심청이가 홀로된 아버지를 두고 인당수에 뛰어든 행위에 대하여, 그것이 진정한 효인가 아닌가에 대하여 논해보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러므로 넌센스 퀴즈를 내고 웃기는 대답을 내어보라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애초에 논리적 코드가 무시된 이야기에서, 그 이야기 속의 한 이벤트를 두고 논리적으로 가치판단을 해보라는 요구이기 때문에 답은 항상 간단합니다.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주인공의 행위는 틀렸다”가 답이 됩니다. 보다 정확한 답은 “틀려도 너무 틀렸다”일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을 비논리적(초논리적)으로 풀어 본 것이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사회적 코드(실천적 인식관심)가 심미적 코드(해방적 인식관심)에 기생할 때는 그 양상이 아주 극단화되기 때문에 그 비논리성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가 로또복권(1등 당첨!)이 되는 것도, 기생의 딸(남원 스타일?)이 정경부인이 되는 것도 논리를 초월한 그런 ‘코드의 기생’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돌아다니는 이야기들의 본색(本色)을 한 번 들여다보면 꽤 재미가 있을 듯합니다. 인기 있는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 신문지상이나 TV에서 전경화되는 사건 사고(기사화하는 정치적 스토리텔링), 인터넷을 떠도는 괴담, 카카오톡을 달구는 음담패설,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사회가 관심하는 주된 인식관심과 코드를 반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무엇이 무엇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과장과 왜곡이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이야기 속을 누비고 다닙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배척하지도 않는 ‘백성 근성’도 만만치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태반이 누구를 욕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는 의도에서거나 심심한 척하면서 자기의 이득을 취하려는 이야기들 일색입니다. 잘 가려서 듣고, 섣불리 부화뇌동하지 않는 신중함이 요구되는 때라 하겠습니다. 인간관계는 갈기갈기 찢어지고,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고, 조직원 모두가 눈치 보며 제 잇속을 챙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언필칭 깍다귀 하품(下品)들의 세계에서 살고 싶지 않으시다면요(속고 나서 후회하면 때가 이미 늦습니다).

<2013. 8. 2.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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