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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ug 04. 2019

사각형의 기억

이코노믹씽킹


사각형의 기억


송찬호 시인의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라는 시가 생각이 납니다. 장지(葬地)에서의 쓸쓸하고 허망한 소회를 어떤 식으로라도, 어떤 가지런한 것으로, 쓸어 담으려는 시인의 애잔하면서도 꿋꿋한 심사가 좋았던 시였습니다. 젊어서 시를 좀 읽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시 중의 한 편이었습니다. 다시 찾아 읽었습니다.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시가 긴 편이라 그 중의 한 연만 옮겨 봅니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와
냉장고 속 냉동된 각진 고기덩어리의 식은 욕망과
망각을 빨아들이는 사각의 검은 잉크병과
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 <송찬호,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지금 보니 좀 앳된 과장이 엿보이기도 합니다만, 시인의 삶에 대한 통찰은 여전히 빛납니다. 제게는 이 부분이 ‘삶은 죽음을 내장하고 있다’라는 것과 ‘사각의 이미지는 내게 죽음으로 각인된다’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죽은 자와 관련된 것들이 가지고 있는 사각의 이미지와 대지(大地)의 사방(四方) 관념이 겹쳐지면서 삶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콘텍스트가 형성되는 듯했습니다. 오늘 다시 보니 예전보다 더 헐겁고 어두운 느낌입니다. 무엇이든, 젊어서 볼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송찬호 시인의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라는 시가 생각이 난 것은 『이코노믹 씽킹』이라는 책을 보다가 사각형 포장 용기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대목을 발견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씽킹’의 저자는 왜 우유팩은 사각형이고 음료수 캔은 원통형이냐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그 까닭을 경제적 효용성의 측면에서 풀이합니다(코칭이니 왓칭이니 씽킹이니 하는 외래어가 유행하는 이유를 나중에라도 한 번 꼭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왜 우유팩은 사각형이고 음료수 캔은 원통형일까? : 알루미늄 캔이든 유리병이든 모든 음료수 용기는 원통형이다. 반면 우유팩은 거의 언제나 횡단면이 직사각형이다. 제품을 진열할 때 횡단면이 직사각형인 용기가 원형인 용기보다 공간 활용도가 높다. 그렇다면 왜 음료수 제조업자들은 원통형 용기를 고수하는 것일까? 
한 가지 가능성은, 음료수가 원래 용기에 담긴 상태 그대로 소비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경우 원통형이 손에 잡기 더 편하기 때문에 원통형 용기를 진열하는 데 따르는 추가비용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우유는 용기에 담긴 그 상태로 소비되기보다는 컵 등에 일정량씩 옮겨져 소비되는 게 일반적이다.
설령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유를 다른 용기에 따라 마시지 않고 팩에 든 그대로 마신다고 해도 비용편익의 원리에 따라 우유팩의 디자인이 원통형으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내용물이 무엇이든 사각형의 용기는 공간 활용 면에서 경제적이지만 그렇게 절약되는 공간은 음료수보다 우유의 경우에 더 가치가 높다. 슈퍼마켓에서 대부분의 음료수는 일반 선반에 진열되는데 이런 선반은 구매비용도 저렴하고 운영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 그러나 우유는 예외 없이 구매비용도 비싸고 운용비용도 적잖이 들어가는 냉장 유리장에 진열된다. 따라서 우유 진열장의 공간이 더 가치가 높고 결과적으로 우유는 사각 용기에 담아야 더 큰 부가적인 편익이 발생하는 것이다. [로버트 프랭크(안진환 역).『이코노믹 씽킹』 중에서]


구구한 설명을 달고 있지만, 사각형 용기 포장이 우유 제품에서만 부가적인 편익이 발생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설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가격이 높은 일부 유제품들은 원형 용기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사각의 종이 포장용기에 담긴 유제품을 만났을 때의 느낌은 ‘비용 절감’이었습니다. 한쪽 모서리를 밀어서 열고 내용물을 마시는 기분도 새로웠습니다. 마치 작금의 ‘밀어서 장금 해제’를 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저는 우유 제품의 용기가 사각형 종이팩으로 굳어진 것은 그것이 ‘식료품’ 취급을 받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일종의 필수품이기에 비용 절감을 우선시 하는(엥겔 지수를 낮추려는) 소비자의 심리에 어필한다는 거지요. 여타의 음료수들은 필수적인 식료품이 아니기 때문에 ‘비용 절감’보다는 ‘기호(嗜好)에의 영합’이라는 측면이 더 강조됩니다. 만지거나 소유해서 더 기분이 나아지기를 소비자들은 그것에서 원한다는 겁니다. 비싼 커피를 플라스틱 잔에 담아서 들고 다니는 심리와 유사하다는 거지요. 그렇게 보는 게 온당하지 싶습니다. 진열장 운운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요즘은 모두 다 냉장 보관이니까요.


어쨌든 ‘이코노믹 씽킹’이라는 것은 언제나 견강부회일 때가 많습니다. 돈 버는 사람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아무런 ‘씽킹’이 없는 사람들이 큰 돈을 법니다. 경제, 경영 논리에 밝은 사람 치고 큰 돈 버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늘 작은 것에 눈독을 들이다가 큰 것을 잃는 게 주로 그들이 하는 일입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교육계에서도 마찬가지의 일들이 자주 벌어집니다. 교육을 경제 논리로 이해(씽킹)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육계가 늘 쑥대밭이 됩니다. 당면한 한 끼의 허기를 때우기 문전옥답을 수시로 다 갈아엎습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입으로만 외칩니다. 속으로는 천박한 ‘이코노믹 씽킹’이 난무합니다. 이 땅의 교육을 좌지우지하는 자들 가운데 인문학이 교육학이라는 걸 모르는 자들이 태반입니다. 
<2012.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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