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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ug 05. 2019

두 편의 벌레 이야기

변신, 벌레이야기

두 편의 벌레이야기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살이에 대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벌레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카프카의 『변신』일 것입니다. 벌레이야기는 우리 민담 속에서도 친숙한 소재입니다. 우리 전래 민담 중에서는 우렁각시 이야기나 지렁이 낭군 이야기 같은 것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 전통 위에서, 본격적으로 인간탐구의 목적 아래 만들어진 벌레 이야기가 『변신』입니다. 깊이 있는 인간성 통찰, 인간애에 대한 반어적 호소, 충격적인 서사 전개와 세밀한 심리 묘사에 있어서 『변신』의 오른편에 설 작품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만한 문학적 성과를 낸 벌레 이야기를 다시 만나기가 힘든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 있었는데, 고개를 약간 들자, 활 모양의 각질(角質)로 나뉘어진 불룩한 갈색 배가 보였고, 그 위에 이불이 금방 미끄러져 떨어질 듯 간신히 걸려’ 있는 상태가 보였습니다. ‘그의 다른 부분의 크기와 비교해 볼 때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눈앞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커다란 지네와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레고르는 벌레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카프카가 우리에게 들려준 벌레 이야기는 소위 판타지 소설의 한 전형을 이룹니다. 프랑스 구조주의 문예이론가인 토도로프는 우리가 어떤 이야기 앞에서 그것을 인정할 것인가를 두고 어쩔 수 없이 망설일 때 판타지가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레고르가 자신이 벌레가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우리가 꽤나 오랜 시간 망설였다면, 그리고는 결국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면, 이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토도로프의 말도 그럴듯하고 『변신』의 내용들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스토리 전개가 절박하여 읽다 보면 꽤나 그럴듯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믿기 어려운 내용이라는 걸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독자를 무시한 우격다짐 식 서사 전개라는 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가 카프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없던 우리가 별안간 인두겁을 쓰고 이 우주 안으로 무작정 던져진 사실,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는 사실과 비교해 본다면, 그 정도의 ‘변신’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작품 안에서 그레고르의 ‘벌레적’ 삶을 그렇게 충실히 묘사해내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런 짐작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카프카의 열정에 동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정도는 그냥 믿어주어도 손해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것입니다. 그가 하루아침에 벌레의 몸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 인정하면 그 나머지 것들은 그야말로 하나 빠짐없이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야말로 진솔한 표현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말대로라면 어느 일면에서는 우리의 삶을 곧이곧대로 비추어 주는 순수 ‘레알’이 되는 것이지요.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면서 ‘저게 나라면?’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해괴한 상상이라고까지 여겨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얘야」하고 아버지가 동정에 차서, 그리고 눈에 뜨이게 이해심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면 우리가 무얼 해야겠니?」

누이동생은 조금 전에 확고하던 것과는 반대로 울다보니 사로잡히게 된 속수무책의 표시로 어깨를 움찔할 뿐이었다.

「혹시 저 애가 우리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다면」하고 아버지가 반은 물으며 말하자, 누이동생은 울다 말고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표시로 격하게 손을 내저었다.

「만일 저 애가 우리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다면」하고 아버지가 되풀이했는데, 눈을 감음으로써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누이동생의 확신을 받아들였다. 「그렇기라도 하다면 저 애와 협상이라도 되련만. 그런데 저렇게 - 」 

「내보내야 해요」 누이동생이 소리쳤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에요, 아버지. 이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우리가 이렇게 오래 그렇게 믿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불행이에요. 그런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오빠일 수가 있지요? 만약 이게 오빠였더라면, 사람이 이런 동물과 함께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리고 자기 발로 떠났을 테지요. 그랬더라면 오빠는 없더라도 계속 살아가며 명예롭게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이 동물은 우리를 박해하고, 하숙인들을 쫓아내고, 분명 집을 독차지하여 우리로 하여금 골목길에서 밤을 지새게 하려는 거예요. 보세요, 좀, 아버지」 누이동생이 갑자기 소리쳤다. 「벌써 또 시작하네요!」 그레고르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모를 놀라움에 사로잡힌 누이동생은, 마치 그레고르의 가까이에 있느니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희생시키겠다는 듯이, 어머니마저 저버리고 그야말로 안락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아버지 뒤로 달려갔고, 아버지 또한 누이의 태도로 한층 더 흥분하여 몸을 일으켜 누이동생을 보호하려는 듯이 두 팔을 누이동생 앞에서 반쯤 쳐들었다.

그러나 그레고르는 그 누군가를, 더구나 자신의 누이동생을 불안케 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는 다만 자기 방으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몸을 돌리기 시작했었는데, 괴로운 상태여서 힘들게 몸을 틀다 보니 머리의 힘도 빌려야 했고 그러다보니 여러 번 머리를 쳐들어 바닥에 찧었기 때문에, 그것이 결국 눈에 띄게 되었다. 그는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략> 그가 자기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이 황급히 닫히고, 단단히 빗장이 질려 차단되었다. 등 뒤에서 난 갑작스러운 소음에 그레고르는 너무도 놀라 그의 작은 다리들이 휘청 오그라들었다. 그렇게도 서둔 것은 누이동생이었다. 똑바로 벌써부터 거기 일어서서 기다렸다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튀어 왔기 때문에 그레고르는 누이동생이 오는 소리조차 못 들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문 속에 꽂힌 열쇠를 돌려 잠그며 누이는 「마침내!」하고 부모를 향해 소리쳤다. [프란츠 카프카(전영애 옮김), 『변신』중에서]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고립된 방안에서 쓸쓸하게 죽어가고 그의 죽음을 확인한 그의 가족들은 교외로 나들이를 나갑니다. 오래 지속되는 불편과 고통은 쇠도 녹이는 법, 때 묻고 거추장스러운 과거의 윤리를 버리고 새 윤리를 찾아 그들은 밖으로 나섭니다. 과거의 가족은 잊기로 합니다. 그레고르와 관련된 기억을 모두 깨끗하게 잊고 밝은 새 출발을 다짐합니다. 그레고르가 죽고 나서부터의 가족들의 동태를 묘사하는 『변신』의 결구(結句)는 가히 절창(絶唱)입니다. 인간의 실존을 그렇게 잘 묘사한 글도 잘 없을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서 아쉬웠던 것은 그레고르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너무 볼품이 없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지나치게 그레고르를 이상화시키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혹시 예수 리스도와 관련된 희생양이라는 서구적 주제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었을까요?).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랬습니다. “감동과 사랑으로써 식구들을 회상했다. 그가 없어져 버려야 한다는 데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의 그것보다 한결 더 단호했다. 시계탑의 시계가 새벽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내내 이런 텅 비고 평화로운 숙고의 상태였다.”라는 이른바 ‘임종(臨終)의 변(辯)’은 어딘가 모르게 좀 작위적인 끼워맞추기라는 느낌을 선사합니다. 혹시 급하게 결말을 짓고 싶어 하는 조급성이 개입된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듭니다. 물론 작가가 의도한 것이 ‘살아있으나 어쩔 수 없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소외’를 그려내는 것이었다면 그런 소략한 임종 묘사가 오히려 작품의 텍스트성을 옹호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의식은 여태 인간인데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벌레인 그레고르의 무력감이라든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어쩔 수 없이 인간적 차원에서 느껴야 하는 가족들에 대한 배신감 같은 것들을 너무 길게 나열했을 때 부득불 초래될 수도 있는 ‘주제의 분산’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아쉬움을 느끼는 것 자체도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효과의 일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카프카의 『변신』은 촌철살인(寸鐵殺人),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명(名) 묘사 장면을 숱하게 내장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벌레로 바뀐 것은 그레고르 잠자이지만 정작 벌레인 것은 인두겁을 덮어쓴 그 주위의 인간들입니다. 통렬한 도치(倒置)입니다. 그런 느낌이 불러내는 또 한편의 소설이 있습니다. 벌레 이야기는 아니지만 ‘벌레 이야기’라는 제목을 가진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는 아예 그런 인간의 삶에 내장된 ‘도치’, 인간이 직면하는 삶의 모순을 소설적 주제로 삼고 있는 소설입니다.     

유괴범에게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는 산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고통이 찾아옵니다. 정작 자신은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데 유괴범은 이미 종교 안에서 죄씻음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피해자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 있는데 가해자는 스스로 평안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사후의 신장과 두 눈알을 다른 사람에게 바칠 약속까지 해놓고’ 있었습니다. 그 모순이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고 여긴 ‘아내’는 신이라고 해서 자기보다 먼저 ‘용서’를 베풀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울부짖습니다. 그 어떤 노력도 물거품이 되고 말 뿐이었고, 결국 자식을 잃고 부조리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 어이없는 ‘도치(倒置)’가 절실하게 전달되었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게는 다른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그럴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내게는 다만 그 아내의 절망과 아픔을 안타까워하면서 귀에도 들어가지 않을 부질없는 소리들로 그녀의 심사만 어지럽혀댔을 뿐 다른 위로의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과연 마지막 절망 속에 자신을 힘없이 내맡겨 버리고 있었다. 김집사나 나의 어떤 소리도 도대체 의식에 닿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다시 입을 까맣게 다물어버린 아내는 물 한 모금을 제대로 마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아, 아내의 그 절망과 고통의 뿌리가 어디가지 닿아 있는지를 차마 짐작이나 했을 것인가. 아내는 결국 그러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간이고 섭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여 절망의 뿌리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그 사람 김도섭의 사형집행 소식이 아내를 거기까지 자극했었는지도 모른다.

해가 바뀌고 2월로 접어들어 김도섭은 마침내 교수형이 집행됐고 그 소식이 라디오에까지 방송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 김도섭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몇 마디는 내게까지 어떤 새삼스런 배신감으로 몸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이제 와서 제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제 영혼은 이미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영혼뿐 아니라 제 육신의 일부는 이 땅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태어날 것입니다. 저는 저의 눈과 신장을 살아 있는 형제들에게 맡기고 가니까요.”

형장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이었다. [이청준, 「벌레이야기」 중에서]    

 

저는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지 않았습니다. 읽은 ‘동기’도 없었습니다. 소설을 공부하는 입장이었고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었던 탓에 거의 의무감에서 읽었습니다. 『변신』이든 「벌레이야기」든, 젊어서는 그런 이야기를 읽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그런 작품들이 보여주는 부조리가 너무 싫었습니다. 인습과 습관에 젖어 무탈하던 세계가 갑자기 무중력 상태에 내던져지는 사태가 너무 싫었습니다. 그런데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그런 식의 ‘거부감’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왜 작가들이 그런 소설들을 써야했는지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되기 시작했습니다. 따로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벌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013. 8. 5.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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