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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ug 10. 2019

높이의 기억

오층도 높다


높이의 기억


아파트에 산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1층부터 20층까지 골고루 살아봤습니다. 1,2층에서 네 번, 4,5층에서 두 번, 14,5층에서 두 번, 20층에서 한 번 살았습니다. 이른바 ‘저층’에서 산 햇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제 느낌으로도 저층에서 살았을 때의 느낌이 좋은 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반려 동물들과 함께 했던 것도 모두 저층에서 살 때였습니다. 언젠가, 사람이 걸어다닐 때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높이에서의 삶은 ‘지상의 삶’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글을 한 번 쓴 적도 있습니다. 그 글의 제목이 ‘오층도 높다’였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목측(目測)이 불가능한 높이는 언제나 ‘불안(不安)’의 한 원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는 저 같이 ‘높이에 민감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일전에 한 동료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동승한 사람보다 더 높은 층수를 누를 때 묘한 쾌감이 찾아든다.”
그래서 그는 43층에 살면서 약간씩 방바닥 구들장이 흔들거리는 듯한 느낌도 참아낸다고 했습니다. 전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밖을 내려다보고 있을 시간도 없거니와 햇살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치고 있을 때가 오히려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높이에 둔감한 이라면 그쪽이 더 솔깃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보다 높아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내던질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른 인간들보다 ‘높아지는 것’을 소망하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콜라 캔이 길어진 것도 그 까닭일 거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왜 콜라 캔은 그렇게 길어졌을까? : 캔의 임무는 음료를 담는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판매되는 28그램짜리 알루미늄 캔은 지름(6.5센티미터)보다 높이(12센티미터)가 거의 두 배 정도 긴 원통형이다. 만약 이 캔의 높이는 조금 낮추고 너비는 조금 넓힌다면 알루미늄 사용량을 적잖이 줄일 수 있다. 이를테면 높이 7.8센티미터에 지름 7.6센티미터의 원통형 캔은 현재 생산되는 캔과 같은 양의 음료를 담으면서도 캔의 생산에 필요한 알루미늄의 양은 30퍼센트나 절감할 수 있다. 이렇게 캔의 높이를 줄임으로써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데 왜 음료수의 캔의 높이는 여전히 12센티미터일까?
이에 대한 한 가지 개연성 높은 대답은 업체들이 소비자의 착시 현상을 이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그림(같은 길이의 막대를 수평과 수직으로 배치한 그림. 그림 생략)을 보여주며 두 개의 막대 중 어느 것이 더 길어 보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수직 막대가 더 길어 보인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두 막대는 길이가 정확히 똑같다.
결국 소비자들은 양이 다를 것이라 믿고 높이가 낮은 캔보다는 높은 캔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 설명에 따르면 경쟁업체들은 손쉽게 이득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만약 소비자들이 단순히 착시 현상 때문에 높이가 낮은 캔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라면 경쟁업체들은 그런 낮은 캔을 선보이면서 기존의 캔과 똑같은 양의 음료가 담겨 있다고 알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낮은 캔의 제작원가가 더 낮은 것을 이용해서 상대 업체의 제품보다 약간 저렴하게 판매가를 책정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 비용을 커버하고도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다. 따라서 착시 현상이 유일한 문제라면 경쟁업체들은 얼마든지 손쉽게 이익 창출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셈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청량음료 구매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이가 높은 캔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높은 캔과 낮은 캔의 양이 아무리 같더라도 소비자는 약간의 가격 차이는 무시하고 높은 캔을 집어 들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호텔에서도 전망 좋은 방에 약간의 프리미엄을 기꺼이 지불하지 않는가. [로버트 프랭크(안진환 역).『이코노믹 씽킹』 중에서]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듭니다. 아파트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높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보다는 덜 영악할 공산이 높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도 양보심 있게 자랄 공산이 더 클 것 같습니다. 당연히 비만 증세도 적게 나타날 거고요. 부부 싸움도 훨씬 줄어들 것 같습니다. 서로 높아지는 걸 포기하고 사니까요. 물론, 근거를 대라면 곤란합니다. 제 이야기가 늘 그렇듯이, ‘믿거나 말거나, 아니면 말고’ 식의 논리이니까요.
<201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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