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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15. 2019

통째로 눈치껏

분절적 사고의 폐해

통째로 눈치껏


저도 종종 그렇습니다만, 하수(下手)들의 일반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분절적(分節的) 사고’입니다. 선후, 인과, 상하, 대소, 대립으로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조급한 것’ 다음으로 많이 발견되는 ‘하수의 징조’입니다. 하나 들으면 고작 둘 알기만 바랍니다.
하수들의 분절적 사고는 글쓰기 공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쓰기도 ‘컴퓨터 모델’로 이해하려 합니다. 재료를 집어넣으면 결과가 나오는데, 이때 시스템 속의 중앙 처리 과정은 이러저러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인간의 발달과정은 기초(입문), 숙달(심화), 통달(응용)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것들의 세부적 단계와 구성적 절차는 이러저러하다고 말하기를 즐깁니다. 그런 공부는 많이 알지만, 잘 쓰지는 못하는, ‘쥐 대가리 때리는’ 글공부에 머무를 공산이 큽니다. 그런 ‘글쓰기 공부에 있어서의 분절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또 답습하고 있는 책이 있어 내용 중 일부를 옮겨 적습니다. 브루스 맥코미스키(김미란 옮김)가 지은 『사회 과정 중심 글쓰기 : 작문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책입니다. 

 

...예컨대 「작문과 문화연구(Composition and Cultural Studies)」에서 제임스 벌린은 무엇보다도 롤랑 바르트의 광고 연구와 존 피스크의 텔레비전 연구에서 끌어온 문화 연구 방법론에 의거해 창안에 해당하는 수사학적 탐구를 위한 발견 학습에 대해 서술한다. 벌린이 지도하는 작문 수업에서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수시학적 탐구를 위한 문화 연구 발견 학습을 이용해서 광고가 생산하는 문화적 의미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를 쓴다.


이 [광고] 분석을 하기 위해 사용되곤 한 주요 장치들은 단 세 가지였지만, 그것들은 발견 학습의 역할을 하는 강력한 기호학적 전략이었다. 이중 첫 번째는 텍스트에 나타나는 이항대립들의 위치(location)이다. 즉 그것은 용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계의 본질인 것이다. 두 번째는 논쟁을 필요로 하는, 의미 수준에서의 외연(denotation)과 함축(connotation)의 발견이다. 세 번째는 가령 호레이쇼 알저(Horatio Alger)의 신화*나 신데렐라의 플롯처럼, 문화적으로 특수하게 환기되는 서사 패턴들의 신뢰도이다. 이 세 가지는 인종, 젠더, 계급이 문화적으로 특수한 범주들로 코드화된 것들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학생들이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피면서,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닌 기호학적 코드들을 조사할 수 있게 하는 탐구 장치의 역할을 담당했다


벌린의 발견학습은 확립되어 있는 다양한 문화 연구 방법론에서 끌어온 것이지만, 그것이 학생들에게 광고의 문화적 의미 생산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도록 촉진하지는 못한다. 광고 분석과 특히 관련이 있는 벌린의 창안을 위한 발견 학습은 학생들이 텍스트가 어떻게 특정한 사회적 의미를 생산하는가를 확실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발견 학습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광고(잡지, 텔레비전 쇼 등)의 기호학적 맥락이 어떻게 핵심 용어들의 함축적 의미를 조건 짓는지 혹은 이 맥락이 특정한 이항 대립이나 사회 서사를 환기시키기 위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도록 자극받지는 못한다. 그리고 발견 학습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핵심 용어, 대립, 서사(또는 이와 관련된 주체 위치)에 대한 특정한 비판적 입장을 정립하도록 고무 받지는 못한다. 바꾸어 말하면 벌린의 발견 학습은 배치 맥락의 기호론적 영향력이나 비판적 소비의 정치적 효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문화적 의미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조사하는 ‘생산 비판(production criticism)’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사회 과정 중심 글쓰기 : 작문교육 패러다임의 전환』, 46-48)


위의 인용문에서 맥코미스키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글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발견학습적(부분적)인 이해’가 글쓰기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생산론적 이해’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것이지요. 맥코미스키의 강조가 아니더라도, 그런 분절적인 사고로는, ‘단번에 소 목을 베는’ 미려한 글쓰기를 배울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복잡한 과정을 스스로 내장하고 있다는 것을, 글을 조금이라도 써본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래서 현재까지는, 맥코미스키도 즐겨 사용한 것이라고 말한, ‘글 읽고 저자 따라 쓰기(read-this-essay-and-do-what-the-author-did)’가 가장 효과적인 글쓰기 공부법입니다(맥코미스키 역시 ‘작문의 세 가지 수준(텍스트적, 수사학적, 담론적)’이라고 해서 또 다른, 정교화 과정을 거친, ‘분절적 사고’를 시도하고 있습니다만). 물론 자신이 몰두하고자 하는 장르의 선택이 먼저이겠지요. 소설을 쓰고 싶으면 소설가의 글을, 시를 쓰고 싶으면 시인의 글을, 학문을 하고 싶으면 학자의 글을 많이 읽고 그를 따라 써야 합니다. 통째로 눈치껏 그들을 답습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견물생심(見物生心)’*, 언젠가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내 ‘글 욕심’이 나옵니다.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견물생심’도 없이 그냥 튀어나오면 ‘소 목’은커녕 ‘쥐 대가리’도 되기 힘듭니다. 고작 누구의 아류에 머문 꼴을 보일 뿐입니다. 통째로 눈치껏, 세상을 사랑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 쓰고 싶은 글을 묵묵히 읽고 따라 쓰다 보면 길이 열립니다. 그 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 호레이쇼 알저의 신화 : 미국의 호레이쇼 알저 목사는 가난한 하층민들이 사회의 최상층으로 올라간 성공담을 130여 권의 시리즈로 발간함으로써 근면하고 검소한 개인은 빈곤을 탈출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자수성가의 신화를 미국 사회에 심어주었다.
* 이 때의 '견물생심'은 반어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사물, 사건을 보고 나 스스로의 생각이 우러나오는 경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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