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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16. 2019

둔재들의 공상

한줌 바람에 날리는 인생

둔재들의 공상     

“바람 한 번 불면 날아갈 인생인데....”

영화 <관상>(한재림, 2013)에서 나오는 말입니다(요즘 시국과 어울리는 말입니다). 초야에 묻혀 사는 역적의 자손 김내경(송강호)은 남다른 재주를 타고 납니다. 관상(觀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성질이나 운명 따위를 판단함) 하나로 세상을 쥐락펴락 합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 남가지몽(南柯之夢), 조신몽(調信夢)을 한바탕 꿉니다만 그 자신 역시 인생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바람’의 희생이 되고 맙니다. 운세를 본다는 것과 좋은 운세를 만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보든 못 보든 우리의 삶은 그저 누군가의 각본에 따라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영화는 잘 보여줍니다. 무엇을 꿈꾸든 그저 둔재들의 공상(空想,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것을 막연히 생각함)일 뿐이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쇼펜하우어가 설명하는 ‘천재(天才)’를 읽다보면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불학무식, 천학비재인 제가 읽어도 금방 알아듣게 설명합니다. 과연 그는 천재적인 철학가입니다. 그에 비하면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들은 그저 둔재에 그칩니다. 눈에 드는 원인 몇 개를 가지고 허풍을 떠는 관상쟁이에 불과합니다. 프로이트의 인간 이해(예술 이해 포함)가 원인에 대한 숙고(熟考)에서 나오는 볼 만한 설명에 속하는 것이라면 쇼펜하우어의 그것은 생의 신비를 고양하는 절대 묘사의 경지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공상은 천재의 시야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그 개인에게 현실에서 부여한 객관 이상으로 확대한다. 따라서 공상의 강렬성이란 것이 천재성의 요인, 즉 천재성의 조건이다. 그러나 반대로 강렬한 공상이 천재성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천재적이지 못한 사람도 때때로 공상을 할 때가 있다. 하나의 현실적인 객관을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천재적으로, 즉 그 객관의 이데아를 파악하면서 고찰하는 것과 그저 이유율에 따라 그 객관이 다른 객관들과 자기의 의지에 대해 갖는 관계에서 고찰하는 두 가지 대립된 방식이 있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상도 두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환상은 이데아를 인식하기 위한 수단이며 그 인식을 전달하는 것이 예술이다. 또 한 가지 환상은 이기심이나 변덕에 안성맞춤이며, 일시적으로 누구를 속인다든지 즐겁게 한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공중누각을 그리는 데 사용된다. 이 경우 공상 속에서 정말로 인식되는 것은 그 관계들뿐이다. 이런 놀이에 몸을 맡기고 있는 자는 공상가다. 그는 자기만 생각하고 즐거워하는 여러 공상을 자칫하면 현실 속에 한데 섞어, 그로 인해 현실에 소용없는 인간이 된다. 그는 아마 모든 종류의 평범한 소설들에 있는 것과 같이 자기 공상의 환영들을 써 갈 것이지만, 독자는 그 작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 그 묘사를 ‘기분 좋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작품은 그 작품의 작가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나 일반 대중에게 인기를 얻는다. [중략]

평범한 사람에게 인식 능력은 인생길을 비추는 등불이지만, 천재에게는 세계를 비추는 태양이다. 인생을 보는 이와 같은 다른 방법은 곧 두 사람의 외모에서도 나타난다.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눈초리는 생생한 동시에 꿋꿋하여 정관, 명상의 성격을 갖추고 있어 쉽게 알 수 있다. 자연은 수백만이라고 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끔 소수의 천재만을 생산하는데, 이들 천재들의 상을 보아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반대로 평범한 사람의 눈초리는 대개 둔하지 않으면 얼빠진 모습인데, 그렇지 않다 해도 정관과는 정반대로 엿보는 듯한 모습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천재적인’ 표정은 의욕보다 인식에서 결정적으로 우세하고, 의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식, 즉 ‘순수 인식’이 거기에 나타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와 반대로 평범한 두뇌를 가진 사람에게는 의욕의 표현 쪽이 우세하여, 인식은 언제나 의욕의 자극을 받아 비로소 발동하며 동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쇼펜하우어(권기철 옮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중에서]     


“평범한 사람에게 인식 능력은 인생길을 비추는 등불이지만, 천재에게는 세계를 비추는 태양”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천재도 아니면서 어려서부터 공상(空想)에 젖어 살아온 저로서는 그 말이 주는 위안과 감동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나이 들어서 정신없이 (돈 안 되는)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는 제 모습이 공상가의 한 전형인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이 입가를 맴돕니다. 어차피 바람 한줌인 인생에서 천재면 어떻고 둔재면 어떤가라는 자포자기(?)도 듭니다. 마치 그런 생각과 느낌에 장단을 맞추기라도 하듯 TV에서는 천년 고도 경주를 답사하는 프로가 나옵니다. 꽤 유명한 역사 강사가 퀴즈를 내면 동반한 연예인들이 답을 맞추곤 합니다. 경주에 많이 있는 고분들을 어떤 것은 능이라 부르고 또 어떤 것은 총이라 부르는 연유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주인이 밝혀진 것은 능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총이라 한답니다. 주인은 모르니 출토품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을 하나 내세워서 금관총이니 천마총이니 부른답니다. 살아생전의 신분에 따라서 능(왕이나 왕비), 원(대군이나 공주), 묘(폐위된 왕)로도 불린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바람 한줌에 불과한 인생을 그렇게라도 도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둔재들의 공상인 듯합니다.      

옛날에 읽었던 양귀자의  「천마총 가는 길」이 생각납니다. 이 소설은 조악하고 폭악했던 80년대의 ‘바람’을 아프게 반추하고 있습니다. 부당한 권력에 의해 자행된 ‘짐승의 시간’을 견디고, 주인공은 경주 대릉원을 찾아서 그곳에 남아있는 천년의 시간으로 그 상처를 어루만집니다. 저에게는 그 ‘짐승의 시간’을 묘사하는 장면들도 가슴 아팠지만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천마총 안으로 들어갈 때의 그 서늘한 느낌에 대한 묘사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 천마총은 무덤의 내부를 반으로 잘라서 사람들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 관람하도록 꾸며져 있었다. 뻥 뚫린 천마총의 굴문이, 그것의 컴컴한 입구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저 검은 통로를 거쳐 무덤 속으로 가기가 겁났다. 마치 단절된 세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검은 입구는 섬뜩하기도 하였다. 두통이 거세어지고 있어서 그는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고 두개골을 꾹꾹 눌러댔다.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합시다. 대리석 기둥에는 그렇게 새겨져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그 앞에서 합장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빨리 가자 아빠, 우리도 얼른 들어가. 한별이의 성화에 밀려 굴속으로 들어서기는 했다. 갑자기 썰렁한 한기가 달려들었다. 그는 아내 모르게 부르르 진저리를 치면서 아이의 손을 꽉 잡았다. [양귀자, 「천마총 가는 길」]    

 

소설에서도 기술되어 있지만,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되는 두꺼운 흙 장벽을 지나고 나면 무덤 내부는 밝고 의외로 볼거리들도 많습니다. 그곳에는 ‘바람’이나 ‘짐승의 시간’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공상일 뿐입니다. 당연히 천재도 둔재도 없습니다. 권력도 없고 부귀도 없습니다. 그냥 땅 속에 묻힌 고독한 인간만 있을 뿐입니다. <2013. 9. 16.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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