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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17. 2019

자애와 염치

밤과 요람

자애(慈愛)와 염치(廉恥)     

늙다 보면 자애와 염치의 중요성을 많이 느낍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과 스스로 부끄러움을 아는 일에는 늘 부족한 것이 인생입니다. 늙는 일의 고단함을 알게 되는 노년에 특히 힘쓸 일이 자애와 염치라는 걸 비로소 알겠습니다. 

자식이든 제자든, 후배든 동료든 내 곁에 있으면서 나보다 젊은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실례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늙은이의 기대와 욕구(성질?)을 충족시키는 젊은이는 없습니다. 오프라인에서든 페이스북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든 예외란 없습니다. 그들은 늙은이들에게 늘 실수를 저지르고 결례를 범합니다. 공자의 제자였던 안회처럼 경탄을 자아낼 정도의 만족감을 주는 ‘젊은 이’들은 실제에서는 아예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인정 속에서 스승보다 일찍 죽는 안회는 아주 특별한 경우라 할 것입니다. 예수와 부처는 그런 제자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사례(事例)에 밝지 못하고 인정(人情)에 통하지 못해서 자비(慈悲)와 염치(廉恥)에 박(薄)합니다. 목전(目前)의 실익, 구호에 그치는 정의와 공평, 세상의 끝을 염두에 두지 않는 조급함 등에 휘둘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늙은이들이 볼 때는 종종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를 범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낸 1인입니다.

‘젊은 이’들과 함께 사는 ‘늙은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忍耐)와 자애(慈愛)의 태도입니다. 참을성 있게 스스로 깨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뻔한 결과에 대해서도 나서지 않고 짐짓 모른 척해야 합니다. 그냥 웃어주거나 침묵으로 대합니다(좋아요나 누릅니다). 젊은이들과는 사우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 속에서 늙게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늙어서 ‘규칙을 위해 죽는 늙은 이’(영화 <일대종사>에 나오는 말입니다)가 될 수 있습니다.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하지 않는다”, 나이 들면서부터 지키려고 노력하는 작금의 제 좌우명 중의 하나입니다. 보통 망설임이 따르는 것들은 그 자체로 모험이거나 아니면 체면이나 염치(廉恥)를 상하게 할 공산이 큰 것들입니다. 이제는 모험심을 가지고 무턱대고 앞으로만 나아갈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실패가 주는 데미지가 너무 큽니다. 먹은 나이가 그런 무모함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움을 자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염치심이 줄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김선생’이 한 말입니다. 복수의 방법이 좀 추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말에 ‘나이 들면(늙으면) 좀 추해져도 된다’라고 그는 응대합니다. 그 대사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까닭이 아마 있을 겁니다. 당시 제 주변의 ‘늙은 분’들이 그렇게 추한 모습을 자주 보이셨거나, 아니면 ‘나도 나이가 들면 추하게 살고 싶다’라는 못난 생각이 뼈에 사무쳤거나일 것입니다. 어쨌거나, 나이 들면서 염치를 ‘아는’ 것의 막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오늘은 좀 오래된 소설 한 편에 대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강석경의 『밤과 요람』이라는 소설입니다. 이제 60대 후반에 든 작가가 20대 때 청년의 패기로 쓴 ‘청년 문학’입니다. 이른바 ‘기지촌 문학’에 속하는 소설입니다. 제가 막 등단했을 무렵, 이 작품에 대한 찬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저는 그때 이 소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남들이 좋다는 것을 우정 피해 다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늙어서야 이 작품을 읽을 생각을 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습니다. 우리 시대(민족)의 외상(外傷)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드레싱(dressing, 상처 부위를 소독함)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청년 문학이 지니는 치기, 과장, 도식성 같은 것도 많이 절제되고 있는 듯했습니다. 본문 중에서 오늘의 주제와 관련된 한 대목을 골라서 옮겨 보겠습니다.     


...선희가 애니 상태를 안 것은 마크가 막 들어오고 나서다. 저녁을 준비하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써니 언니.” 문을 여니 미라였다. “애니가 있잖아.” 선희가 방에서 나서자 미라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애니가 병원에 갔대. 탐슨이 업고 데려갔나 봐. 탐슨이 여태 애니를 침대에 묶어놓고 오늘 돌아와선 뜨거운 커피를 들이부었대. 거기다가.”

“뭐라구?”

선희는 더 물으려다 말았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는데 미라는 샌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선희는 입술을 깨물고 한동안 밖에서 있었다. 선희가 들어서자 마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끔찍해.” 선희는 얼굴을 찌푸렸다.

“애니가 방금 병원으로 갔어. 일이 생겼어. 살림하는 흑인이 있는데 애니가 바람을 피우다가 그에게 들켰거든. 그가 애니의 몸에 뜨거운 커피를 부었어. 음부에”

선희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나 마크는 가만 바라보기만 했다. 선희는 동의를 구하듯 말을 덧붙였다.

“애니는 고소할 거야. 남자들의 폭력을 그냥 받아들이면 안 돼.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써니,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폭력이 아니라 사랑의 방법이야.”

“사랑의 방법? 무슨 말이야?”

선희는 화를 냈으나 마크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 흑인은 여자를 사랑할 줄 알아. 증오할 줄 알아야 사랑도 하는 거야. 나는 그가 부러운데?”

말하다 말고 마크는 주머니에서 손지갑만 한 빨간 상자를 내놓았다. 선희는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손목시계가 없잖아.” 눈이 마주치자 마크는 상자를 선희 앞으로 디밀었다. 상자 속에는 시계가 들어 있었다. <중략>

마크가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나자 선희는 약을 먹으라고 환기시켜 주었다. 마크는 십여 일째 항생제를 먹고 있었다. 처음엔 요도에서 고름이 나왔으나 이제는 그친 듯했다. 마크는 약을 먹고 나서 길쭉한 성기를 꺼내 들여다봤다.

“이따금 통증이 와, 하지만 일주일 뒤면 완쾌될 거야. 당신에게 미안해.”

선희는 마크의 늘어진 성기를 바지 속에 넣어주었다. 지퍼를 올리며 마크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서 시계를 사 온 거야? 난 상관없어.”

“시계는 훔친 거야. 물론 써니에게 줄 생각을 했어.”

선희는 마크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농담인 줄 알았으나 마크의 표정엔 움직임이 없었다.

“난 슬래키 보이야. 원래 도벽이 있어.”

“농담을 하는 거지?”

마크는 담배를 피워 물곤 침대에 걸쳐 누웠다.

“하이스쿨에 들어가던 해야. 그저 인생을 알고 싶었고, 혼자 살고 싶었어. 주유소나 창고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었지만 지칠 때는 도둑질을 했지. 길에 세워둔 자동차 부속품을 떼내기도 했고, 레스토랑에서 고급 식기를 훔치기도 했어. 일년 뒤엔 다시 집에 들어갔지만 도둑질을 여전히 계속했어. 학교 다닐 때는 책만 훔쳤지.”

“들킨 적은 없어?”

마크가 누운 채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무엇을 훔치는 건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냐. 들키지 않기 위해서지.” [강석경, 『밤과 요람』]

     

젊어서는 세상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외로운 자들, 가난한 자들에게 사회가 베푸는 ‘값싼 온정’들에도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당연히 문학이 그들에게 베푸는 ‘말뿐인 위로’도 보기 싫었습니다. 그런 ‘짓거리’는 바닥인생을 살아야 진짜 ‘못가진 자’들에게는 공평도 염치도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떻게든 악착같이 사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믿었습니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외로움을 앞세우고 동정을 구하는 일은 정말이지 못난 축에 속하는 일로만 치부했습니다. 혁명도 아니면서, 그저 ‘한 끼의 동정’이나 ‘말로만 하는 위로’ 같은 것들은 없느니만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변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한계가 있고 어쩔 수 없이 ‘공치사’만 늘어놓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외로움 하나라도 면하는 것이 아주 큰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소설’이란 것들도 결국은 그 ‘외로움 하나’ 면하자고 하는 소행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족 한마디. 사람이 염치(廉恥)를 안다는 것과 자애(慈愛)롭다는 것은 좀 차원이 다른 일인 것 같습니다. 염치에 민감한 이들 중에는 자애에 둔감한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남들보다 번듯한 위치에 처해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유형이 많이 보입니다. 어쨌든 그 둘 다를 갖추어야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에 더 분명하게 접근하는 것이지 싶습니다. 거기다가 의(義)로움까지 더한다면 금상첨화겠습니다만...

<2013. 9. 17.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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