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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17. 2019

의식의 어린 주인

콤플렉스


의식의 어린 주인


① 융의 견해에 따르면, 콤플렉스는 실제적인 ‘정신의 구조’다. 콤플렉스는 그 자체로 심리의 건강한 구성 성분이다. 집단무의식에서 추출되는 자질들은 본디부터 병리학적 대상이 아니다. 개인무의식에서 비롯된 ‘상처의 흔적’들이 만들어 내는 부작용들은 콤플렉스의 원래 속성과는 많이 다르다.



② 분석 과정을 통해서 억압된 갈등 요소들이 밝혀지는 것과 같이,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 덧붙여진 내용물들이 제거되면 콤플렉스의 진정한 면모가 드러난다. 집단무의식의 한 ‘마디(nodal point)’를 이루는 콤플렉스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콤플렉스와 대면하면, 이전까지 개인적 분규에 사로잡혔던 개인은 더 이상 그의 개인적 갈등에 연연할 필요가 없게 된다. 태고의 시간부터 고통받고 그것을 해결해 온 ‘인간’에 합류한다. 그에게 의지하고 그와 함께 갈등의 해소에 나선다.


③ 콤플렉스 내용물에 대한 구구한 설명이 ‘진정한 해소(벗어남)’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보통 그런 ‘설명’들은 ‘질서를 벗어난’ 한 개인의 개인적 특수성(그만의 색깔, 그만의 고통)에 몰두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오직 상징적 차원 위에서의 해석만이 콤플렉스의 핵을 탐사할 수 있게 한다. 콤플렉스를 덮고 있는 병리학적 요소의 덮개를 벗겨내는 일은 그것을 ‘개인적인 조건’에서 분리해서 고찰할 때 가능하게 된다.


④ 개인적인 무의식의 자질 속에 묻혀있어서 늘상 의식과 날카롭게 갈등을 빚으며 대치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콤플렉스도, 일단 한 번 그 ‘핵(nucleus)’이 (알몸 상태처럼) 드러나면 곧바로 집단무의식의 문제로 대치된다. 예를 들어보자. 이제 개인은 더 이상 자신의 어머니와 마주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모성의’ 원형과 마주한다. 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유발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개인적 문제(구체적 현실) 대신에 인류 공통의 보편적 문제로서의 ‘자기 안의 모성적 기반’이라는 비개성적 문제에 대해서 관심하게 된다.


⑤ 그러한 심리적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이 얼마나 큰 구원의 느낌을 주는지 상세히 알고 있다. 아버지와의 문제 때문에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아들에게는 그것이 비단 개인적인 차원의 것만이 아니라 전 인류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게 된다. 오래된 신화와 우화 속에서 늙은 아버지 임금을 죽이고 그의 왕관을 이어받는 아들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아들은 더 이상 개인적인 갈등의 원천으로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그에 대한 공격과 복수의 마음’을 다루지 않는다. 그것만큼 다행스런 일이 또 있을까?


⑥ 콤플렉스는 과도한 개인적 자질에 의해서 지나치게 ‘부풀어 오른’ 상태가 아니라면 결코 해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효율성을 제고한다. 왜냐하면 심리 활동 가운데 어쩔 수 없이 그것으로 ‘에너지’가 특별히 더 공급되기 때문이다. 마치 천에다 염색을 할 때 뭉쳐진 곳에 더 염료가 진하게 묻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것에 덧씌어진 개인적 자질들을 떼어내고 그 알몸을 확인하는 일만이 그것으로 인한 신경증이나 정신병을 예방하는 확실한 방법이라 할 것이다.[Jolande Jacobi, Complex Archetype Symbol in the Psychology of C.G. Jung]


야코비가 지은 ‘칼 융의 심리학에 나타난 콤플렉스, 원형, 상징’의 번역에 나선 것은 대학원에 진학한 직후였다. 지도교수님의 권고로 틈날 때마다 한 장씩 우리말로 옮겨나갔다. 학부 시절 영어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았기에 번역 작업은 보통 난공사가 아니었다. 간단한 것 빼고는 거의 모든 단어를 다 사전에서 확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꼬박 1년이 걸렸는데 그 사이 사이 번역된 것을 지도교수님에게 갖다드려서 감수를 받았다. 선생님은 매번 수고했다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리고 또 한 마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영어가 되니까 공부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겠다”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럴 때마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완역을 해서 이미 출판이 된 상태였지만 그때의 ‘무지의 만용’이 늘 죄책감으로 이어지곤 했다. 대학에 자리를 잡고, 그쪽으로 공부가 좀 쌓이고 난 뒤 전편을 다시 번역했다. 수많은 오역 앞에서 부끄러움에 치를 떨었다. 그때 많이는 몰라도 하나는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부수익으로 그 과정에서 융 심리학의 인문주의가 비로소 좀 이해가 되었다.


번역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따로 있었다. 이를테면 “그것에 덧씌어진 개인적 자질들을 떼어내고 그 알몸을 확인하는 일”을 그것이 시시때때로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껍질이 깨어지는 아픔’을 수도 없이 겪었다. “개인적인 무의식의 자질 속에 묻혀있어서 늘상 의식과 날카롭게 갈등을 빚으며 대치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콤플렉스도, 일단 한 번 그 ‘핵(nucleus)’이 (알몸 상태처럼) 드러나면 곧바로 집단무의식의 문제로 대치된다”라는 융의 설명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내 모성 콤플렉스를 건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열세 살에 어머니를 잃고, 어린 길고양이처럼 무정도시에 ‘함부로 애틋하게’ 내던져진 내 개인 무의식이 그리 만만한 존재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아예 접근조차 어려웠다. 한 번 만날 때마다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플 때도 많았다. “내 모든 실패한 연애와 교우는 모두 너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가 완전히 그 아이와 결별할 뻔한 일도 있었다. 그 아이는 사실 상의 내 의식의 주인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나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자인하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내 안의 ‘어린 주인’과 면회할 때에는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한다. 내 글쓰기가 그 아이가 허락한 몇 가지 면회 절차 중의 하나라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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