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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21. 2019

천도무친

지극한 것들

지극한 것들


상(商)나라 재상 탕(蕩)이 장자(莊子)에게 인(仁)을 물었다. 장자가 대답했다. “호랑이와 이리가 인입니다.” 탕이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요.” 장자가 대답했다. “호랑이 부자(父子)도 서로 사랑합니다. 어찌 인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탕이 말했다. “지극한 인을 듣고 싶은데요.” 장자가 대답했다. “지극한 인에는 친(親)이란 것이 없습니다.” 탕이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무친(無親)이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사랑하지 않으면 불효라고 하던데 지인(至仁)은 불효해도 된다는 것인지요.” 장자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지극한 인이란 말씀하신 것보다 높은 경지입니다. 효(孝)만을 들어서 지극한 인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효도를 넘어섰다는 말이 아니라 효 따위로는 미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장자』 외편, 「천운(天運)」, 윤재근, 『우화로 즐기는 장자』 참조]


앞장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경전에서 질문자로 등장하는 이들은 언제나 세속(상식)을 대변합니다. 이번에는 상나라 재상 탕(商太宰蕩)이 그 역할을 맡았군요. 물론 가상 인물입니다. 그는 인(仁)에 대해 묻습니다. 이 질문을 ‘발견’을 위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이야기는 우화이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곧이곧대로 새겨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테면 ‘행간의 의미’를 좀 살펴야 합니다. 탕이 인, 혹은 지극한 인에 대해서 묻고 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그를 내세운 사람이 원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상세하고 곡진한 설명이 아닙니다. 그는 사실 공맹(孔孟)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공맹이 대단하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들의 ‘말씀’ 안에 진리가 담겨 있다고들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장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공맹의 개념들은 그저 인간의 좁은 시야에 포착된 것일 뿐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공자의 ‘인’ 개념을 확장해서 사용합니다). 노자의 천도무친(天道無親)을 가져와서 ‘지극한 인에는 친(親)이란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바로 탕이 알아들으면 우화가 아닙니다. 탕은 끝까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야 합니다. 그래서 그러면 불효 아니냐고, 효와 인이 모순관계에 놓이면 되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는 ‘효 따위(공맹의 언설)가 미치지 못하는 경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장자가 그들의 ‘말씀’이 ‘호랑이와 이리’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말할 때 벌써 주제를 파악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합니다. 작은 이치에 집착하지 말고 좀더 시야를 넓혀달라는 장자의 권고를 끝내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우화가 됩니다.


사족 한 마디. 천도든 인도든, 도(道)에 무지한 저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맹이나 노장이나 어차피 오십보백보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인간세(人間世)는 호랑이와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천도만 무친(無親)인 것이 아닙니다. 인도(人道)도 무친(無親)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인간’이라는 말이 곧 ‘호랑이와 이리’를 가리키는 말임을 아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요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굳이 나누어서 인간을 높이 치자는 장자의 허세(?)가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그 역시도 공맹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이 글이 『장자』 외편에 속해 있는 내용을 흠잡는 것이니 장자의 사상 그 자체를 부정하는 말은 아님을 알아주십시오). 공맹을 뒤집기는 하지만 결국은 ‘후라이팬’ 안에서 ‘달걀후라이’ 뒤집는 것에 그치는 거 아니냐는 생각마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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