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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22. 2019

가벼운 것을 무겁게

몸 공부의 이치

가벼운 것을 무겁게


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말했다. “위왕(魏王)이 큰 박씨를 주길래 그것을 심었더니 크게 자라 5석(石)이나 들어갈 정도로 큰 열매가 열렸소. 거기에 물을 담자니 무거워 들 수가 없고, 둘로 쪼개서 바가지로 쓰자니 납작하고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소. 확실히 크기는 컸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 부셔버리고 말았지요.”(장자의 주장이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다는 것을 풍자한 것) 장자가 말했다. “선생은 큰 것을 쓰는 방법이 매우 서툴군요. 송(宋)나라에 손 안 트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소. 그는 (그 약을 손에 바르고) 대대로 물로 솜 빠는 일을 가업으로 이어왔소. 한 나그네가 그 소문을 듣고 약 만드는 방법을 백금(百金)으로 사겠다고 하자, 친척을 모아 의논하기를 <우리는 솜 빠는 일을 대대로 해 오고 있지만 수입은 불과 몇 푼에 불과하다. 이 기술을 팔면 단박에 백금이 들어온다. 그러니 팔도록 하자> 하였다오. 나그네는 그 약 만드는 법을 가지고 오왕(吳王)을 찾아가 설득했소. 마침, 월(越)이 쳐들어오자 오왕은 이 사람을 장군으로 삼았는데, 겨울에 월군(越軍)과 수전(水戰)을 하여 크게 그들을 무찔렀소. (월군은 손 트는 고통 때문에 가진 전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었다) 오왕은 그 공적을 높이 사 그 사람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소. 손을 트지 않게 하는 일은 매 한 가지였으나, 한 사람은 그 기술로 영주(領主)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고작 솜 빠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그쳤소. 그것은 그들이 같은 것을 가졌으나 쓰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오. 지금 선생에게 5석이나 들어가는 박이 생겼다면 어째서 그 속을 파내 큰 술통 모양의 배를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즐기려 하지 않소. 즐길 생각은 않고 그저 납작해서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는 걱정만 하고 있으니 그게 바로 선생의 마음의 병통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장자』 내편, 「소요유(逍遙遊)」, 안동림 역주, 『莊子』 참조]  


장자의 소론(所論)이 이미 그 시절부터 논란거리였던 모양입니다. 모양만 크고 그럴듯하지 실생활에는 별반 도움을 주지 못하는 ‘공허한 이론’이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비판에 장자는 “그렇지 않다. 너희들이 그것을 쓰는 방법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대응합니다. 물로 솜 빠는 사람들의 손 안 트는 가전(家傳) 비법이 한 나라를 구하는 결정적인 전략(戰略)이 될 수도 있음을 왜 모르느냐고 다그칩니다. 무엇이든 도구의 가치는 오직 그 용도(用途)에 있음을 가르칩니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장자의 반박을 접하면서 독자들은 ‘과연 그렇구나!’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 이 말은 ‘물래이순응(物來而順應)’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이 지닌 물성을 보고, 순순히 그것에 반응하여, 내게 가장 유익한 면을 그 안에서 찾아내면 될 일인데, 사람들은 현재의 내 소용(所用)에 우격다짐으로 그것을 집어넣을 생각만 합니다. 그런 짓거리는 소인배들이나 하는 우매한 짓거리라고 장자는 일갈합니다. 역시 장자의 지혜는 크고 깊다는 생각이 듭니다.


검도이야기 한 토막 하겠습니다. 현대 검도는 ‘죽도(竹刀) 검도’입니다. 검도 경기는 호구를 착용한 상태에서 죽도로 상대의 정해진 가격 부위(머리, 목, 허리, 손목)를 가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히 죽도의 길이와 무게가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길이는 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무게는 들어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아무래도 무게가 가벼우면 좀더 죽도를 빠르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기 전에 죽도를 검량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인 기준 대략 450~500g 정도의 무게가 정량입니다. 그런데 고수(高手)가 되면 도리어 죽도 무게를 늘려잡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손잡이(칼자루)가 두껍고 무게가 몇 십 그램 더 나가는 죽도를 선호합니다. 죽도가 가벼우면 칼 쓰는 맛이 오히려 경감되어 재미가 덜하다고들 말합니다. 고수는 아니지만 저도 그런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두껍고 무거운 칼에 몸을 실어서 상대를 가격할 때 그 쾌감이 일층 증가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술면에서도 죽도의 무게를 이용해서 몸의 힘을 뺀 상태에서 더 빠른 가격을 해낼 수 있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몇 년 전 검도 저널에서 그와 관련된 대화를 한 번 본 일이 있습니다. 전성기 시절 무거운 죽도를 쓰는 것으로 유명했던 한 원로 검도인을 기자가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아직도 무거운 죽도만 고집하십니까?”
일반적인 경우로 상정해 보면 그는 그때쯤이면 왕창 무게가 나가는 죽도를 사용하는 게 마땅했습니다. 기자도 그런 차원에서 신기록이 되는 ‘새로운 무게의 발견’을 원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닐세. 요즘은 가벼운 것을 무겁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네.”
인체에는 한계가 있어 근력이 마냥 늘어나지는 않는 것, 노년에 접어든 몸으로 옛날의 힘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기량(技倆)이 허용하는 한에서 최대한 무겁게 사용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습니다. 말로는 무엇이든 다 말할 수 있고, 머리로는 무엇이든 다 이해할 수 있지만, 몸으로 하는 것에는 그런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할 수 있는 것’만이 가능한 것이 바로 몸 공부였습니다.


장자의 말씀이 큰 것은 검도 수련이라는 ‘몸 공부’에서도 그 진의가 여전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내 몸이 허용하는 한에서 가벼운 것을 무겁게 쓰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무거운 것을 마구 휘두룰 수 있는 힘을 과시하는 것이 공부는 아닐 것입니다. 비단 검도 공부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공부가 다 그럴 것입니다. 무거운 것을 휘두르는 힘만 자랑해서는 공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몸공부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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