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Sep 23. 2019

긍정의 힘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

긍정의 힘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다. ‘된다’가 있으면 ‘안 된다’가 있고, ‘안 된다’가 있으면 ‘된다’가 있다. ‘옳다’에 의거하면 ‘옳지 않다’에 기대는 셈이 되고, ‘옳지 않다’에 의거하면 ‘옳다’에 의지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성인(聖人)은 그런 방법에 의하지 않고 그것을 자연의 조명(照明)에 비추어 본다. 그리고 커다란 긍정에 의존한다(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而照之於天 亦因是也).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 또 저것도 하나의 시비(是非)이고 이것도 하나의 시비이다.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그 대립을 없애버린 경지, 이를 도추(道樞; 도의 지도리)라고 한다. 지도리이기 때문에 원의 중심에 있으면서 무한한 변전에 대처할 수 있다. 옳다도 하나의 무한한 변전이며, 옳지 않다도 하나의 무한한 변전이다. 그러므로 명지(明智)에 의존하니만 못하다고 한 것이다(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此無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 是亦一無窮 非亦一無窮也 故曰 莫若以明). [『장자』 내편, 「제물론(齊物論)」, 안동림 역주, 『莊子』 참조]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란 말이 생각납니다. 인용문 한가운데 놓인 ‘그리고 (성인은) 커다란 긍정에 의존한다(亦因是也)’라는 말 때문입니다. 그 말이 울림이 꽤나 컸던 모양입니다. 왜 그 말이 이제야 제 눈에 들어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연필로 진하게 밑줄까지 쳐져 있는데 말입니다. 왜 궁색한 재독(再讀)에 와서야 그리 크게 울리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그 두 말은 전혀 다른 맥락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흑(黑)이고 하나는 백(白)입니다. 하나는 그늘에서 자라나는 것이고 하나는 밝은 태양 아래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라는 말을 제가 본 것은 일본의 군국주의자 작가 미시마유키오(三島由紀夫)에 관한 소론에서였습니다(김항, 「천황과 폐허 : 상승과 하강의 벡터」). 미시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중에 문득 든 생각이지만, 전쟁은 에로틱한 시대였다. 지금 항간에 범람하는 지저분한 에로티시즘의 단편들이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로 모아져 정화되던 시대였으나 전후(戰後)는 나에게 삼등석에서 보는 연극 같은 것이었다. 모든 것에 진실이 없고, 겉모습뿐이며, 공감할만한 희망도 절망도 없었다.” 그는 공습이 한창이던 전쟁 말기에 동원된 젊은이들의 생활을 그린 희곡 「젊은이여 되살아나라」(1954)에서 공습의 위험 속에서는 열렬히 사랑하던 젊은 남녀가 패전 직후에 헤어지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재회하자는 소녀에게 남자는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속한 날에 만날 수 있을까 없을까는 모두 하늘의 섭리에 달려 있었어. 생각해 보면 사람 사이의 약속이 아름다운 것은 아마 이런 상태 속에서 뿐일 거야. 약속이 지켜질 보증이 없는 상태, 게다가 지킬 수 없음이 결코 사람 탓이 아닌 상태, 그런 상태뿐이야.” 전쟁 중에 가능했던 ‘커다란 하나의 에로스, 공포와 비참을 넘어 모든 욕망이 하나로 합일되는 그 정화와 신성의 상태’가 소멸되었으니 자신의 사랑도 소멸되고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미시마유키오의 유미주의(唯美主義)는 그렇게 독(毒)든 버섯처럼 황폐화된 일본의 전후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인간의 어두운 내면, 그 그늘의 우울을 먹고 그렇게 속성으로(버섯처럼!) 자라납니다. 그가 원한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는 긍정의 철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만 보고 다른 쪽으로는 아예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대시(大是)’가 아닌 ‘소시(小是)’의 인생관이었습니다. 천도(天道)에 어긋나는 역천의 윤리였습니다. 마흔 다섯 살의 나이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할복을 하고 부하로 하여금 자신의 목을 치게 할 만큼 그가 그토록 원했던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꼭 그렇게 했어야만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굳이 성인의 ‘대시(大是)’가 아니더라도, 그 커다란 긍정론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그 전체로 긍정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몸으로 압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그렇게 살갑고 정겨운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질긴 목숨이 바로 그 증좌입니다. 다만, 때로 그 당연한 이치를 잠식하는 세간의 인정(人情)이 있을 뿐입니다. 그 또한 버릴 수 없는 것일 거라 여깁니다. 그것마저 긍정해야 이 세상이 진정한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로 감싸진, 우주에서 하나뿐인 지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족 한 마디. 살다보면 참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에 대해 부정적인 인물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들에게는 긍정과 부정이 보통은 <1 : 9> 정도로 나뉩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의 ‘부정’에는 특별한 이유도 명분도 없습니다. 그저 불신하고, 싫어할 뿐입니다. 그런 ‘주변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종교에 귀의하려고 교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불신하고 싫어하기를 본성으로 하던 이가 문득 종교에 귀의한다고 해서 놀랍기도 했습니다. 놀라기는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좋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으냐?”는 게 그가 제게 한 말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미소와 친절로 대하니 갑자기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라는 거였습니다. 평소 표정이 늘 ‘굳은 얼굴’이었는데 갑자기 얼굴을 활짝 펴려니 어색하기 짝이 없다는 말로도 들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지금은 그렇지만 안으로 확실히 들어왔다 싶으면 어디서나 마찬가지다."라고요. 아마 그이는 당분간 ‘인간은 왜 종교를 가지는가’에 대해서 적지 않은 혼돈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가 종교를 택한 이유가 "나이 드니 여기저기서 종교에 귀의하는 이들을 많이 보겠고 집사람이 권해서였다."였다니 분명 그럴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절감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서로 사랑하고 아껴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는 데에는 남은 시간이 좀 짧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절실하지 않으면 ‘하나의 커다란 에로스’의 세계는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가벼운 것을 무겁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