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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24. 2019

마왕

슈베르트와 트루니에의 마왕

마왕(魔王)


어제 TV에서 슈베르트의 <마왕(魔王)>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저것 재미난 스토리텔링과 함께 <마왕>을 들으니 정말이지 ‘마왕’을 눈앞에 두고 바라보는 듯했습니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이야기’가 깃들여야 진정한 예술이 되는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18살의 천재 작곡가 슈베르트가 <마왕>을 작곡해서 출판사에 보냈는데 출판사에서는 그 신곡을 도저히 판정(이해?)할 수 없어서 동명이인의 슈베르트에게 그것을 보내고, 그는 다시 ‘이런 엉터리 곡을 내가 작곡했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는 편지를 동봉해 반송했다는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미 미래는 와 있었는데, 과거에 젖어 사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엉터리’로 보였다는 겁니다. 슈만이 아니었다면 슈베르트가 송부한 미래는 영영 우주의 미아로 사라져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반송(返送)과 발견’이야말로 천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최초의 방식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서양인들의 ‘마왕’에 대한 사랑은 각별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유럽에 퍼지면서 (토속신앙을 무자비하게 토벌하면서) 생긴 일종의 보상(집단무의식적 차원의)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마왕’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 묘한 애증병존이 젊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의 유명한 <마왕>, 미셸 투르니에의 『마왕』도 그러했습니다.


『마왕』은 아벨 티포쥬라는 한 프랑스인이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의 길을 찾아 나서는 모험담 형식의 소설입니다(보통 이런 소설의 주인공을 신화문학론에서는 ‘탐색 영웅’이라고 부릅니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3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입니다. 이 소설은, 회상(유년의 기록, 11살의 소녀 마르띤느와의 만남, 살인범 바이드만의 사형 장면 목격담 등)으로 이루어진 전반부와 ‘비둘기 사육병’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겪는 경험담(포로가 되기까지의 과정, ‘칼텐보른’에서의 운명 찾기 등)인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아벨 티포쥬가 자신의 운명을 찾는 과정은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과 유사합니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앞길을 열어 밝히는 신화적 상징들을 찾아갑니다. 이 운명의 드라마는 ‘아벨 티포쥬’라는 그의 이름에 대한 고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벨이라는 내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을 자세히 이야기하는 성서의 구절들이 눈에 띄던 날까지 아벨이라는 이름은 내게 우연처럼 보였다. 아벨은 목동이었고 카인은 농부였다. 목동은 떠돌이고 농부는 정착민이 아닌가. 아벨과 카인의 싸움은 유랑민과 정착민의 격세유전적인 대립처럼, 더 정확하게 말해 유랑민에 대한 정착민의 가혹한 박해처럼 태초부터 오늘까지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희생자는 유랑민이다. 정착민의 증오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파렴치하고 치욕스런 방법으로 집시들을 통제한다. 정착민은 집시를 전과자처럼 다루지 않는가! 게다가 마을 입구에 ‘유랑민 숙영 금지’라는 푯말까지 세운다.
카인은 저주를 받았고, 아벨에 대한 증오심처럼 그의 벌은 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신이 카인에게 말했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렇게 카인은 그의 입장에서 가장 혹독한 벌을 받았다. 카인은 예전의 아벨처럼 떠돌이가 되어야 했다. 카인은 그 판결에 반항하며 복종하지 않았다. 그는 신의 면전에서 멀리 물러났다. 그리고 최초의 마을을 세우고 ‘에녹’이라고 불렀다. [미셸 투르니에(이원복 역), 『마왕(과 황금별)』,종문화사]


주인공 아벨 티포쥬는 자신의 이름에서 일종의 운명을 읽습니다. ‘상징’이 문화적 매개가 되어 한 인간의 서술적 정체성에 깊은 홈을 파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출발에서부터 근대적 문제의식(이성을 토대로 한)과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 정착민과 유목민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성서적 알레고리의 도입으로, ‘유목민의 후예’라는 서술적 정체성을 자신의 ‘인생의 플롯’으로 지니게 됩니다. “그가 알아야 했던 것은 독일군 S․S들이 그악스럽게 절멸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두 민족은 유태족과 집시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유목민에 대한 농경민의 천 년 묵은 증오가 그 절정에 달해 있는 것을 재발견한 셈이다.(323쪽)”라고 적습니다. 카인과 아벨이라는 성서적 알레고리가 인간을 정착민과 유목민으로 양분해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양분하는 인식’은 다음의 인용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한 여자 손님이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소녀를 데리고 나를 만나러 왔다. 떠날 때 아이는 도리질을 하며 왼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갑자기 나는 일곱 살 미만의 - 아, 얼마나 현명한 나이인가! - 아이들은 대부분 왼손을 내민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신성한 단순성이여! 그들은 자신들의 순수성으로 인해 오른손이란 가장 가증스럽고 지저분한 일로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오른손이 암살자들의 손, 사제들, 소매치기들, 권력가들의 손 속으로, 마치 창녀가 부자들의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가듯이 미끄러져 들어갈 때, 불쌍하고 모호하며, 또 겸손한 왼손은 오직 누이들의 악수에나 잡히면서 마치 숫처녀처럼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일곱 살 미만의 아이들에게는 항상 왼손을 내밀 것. [『들뢰즈와 문학-기계』에서 재인용]


『마왕』은 한 인간의 서술적 정체성에 관여하는 여러 종류의 상징적 매개들을 잘 보여줍니다. 작가의 해박한 교양이 즐거운 소설을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인들에게 하나의 숙명처럼 각인되어 있는 '근원적 상처'들이 탁월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상징들의 숙소(宿所)’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이제 『마왕』의 주인공 아벨 티포쥬가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지닌(우리 안에 잠들고 있는) 여러 가지 상징체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한 번 되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안의 ‘마왕’이 무엇인지 끄집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국 우리 곁에 와 있는 미래를 ‘현재’로 만드는 동력(動力)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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