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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24. 2019

무의식과 상징

심리학에서의 상징 개념

프로이트와 융의 상징

프로이트학파와 융학파의 상징에 대한 개념 차이는 그들의 무의식에 대한 상이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개인적 무의식에는 원형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내용물은 전적으로 개인의 생활사에서 추출되는 내용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들(개인무의식의 내용물들)이 억압으로부터 표면으로 떠오를 때는 기껏해야 기호(sign)다. 의식적 마음의 한가운데를 관통해서 만들어진, 무엇인가의 대용품인, ‘영상 자료(screen figures)’에 불과한 것이다. 상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집단무의식의 내용물, 즉 원형이 싸이코이드(psychoid, 원(原)심리?)에서 심리 영역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 비로소 진짜 상징이 된다. 그들은 개인사적 산물이 아니라 우주사적인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식적 마음의 이해력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다. 비록 그것들이 표상적 재질과의 동화를 통해(명백히 외적 세계로부터 기인하는) ‘거머쥘 수 있는’ 인지 대상이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다 이해될 수는 없다.  

융은 이렇게 말했다. “무의식적 배경에 이르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의식적 내용물들을, 부정확하게도, 프로이드는 상징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상징이 아니다. 그것(프로이드가 상징이라 부른 것)들이 잠재의식적 과정에서의 신호나 징후의 역할을 할 뿐이라는 프로이드의 이론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렇다. 진정한 상징은 본질적으로 그런 것과는 구별된다. 지금까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정형화되지 못한 그 어떤 직관적 관념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플라톤이 동굴의 우화를 통해서 지식 이론의 전반적인 문제를 표현한 것이나 예수가 우화를 통해 천국의 관념을 표현한 것이 이를테면 순수하고 진정한 상징들이다. 그것들은 여태 존재했던 그 어떤 언어적 개념도 하지 못한 일들을 표현해 내었다.” 예를 들면, 철도 회사원들의 뺏지는 철도의 상징으로 간주될 것이 아니라 철도를 위해 복무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기호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설혹 그것들이 ‘응축되고’ ‘초결정적인 것’들이라 하더라도 프로이드학파의 ‘상징들’은 언제나 인과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들은 모호성을 띠지 않고 단극적인 것들이다. 융이 보는 상징은, 분해될 수 없고 인과율의 기반 위에서 이해될 수 없으며, 예단할 수 없고(nor can it be determined in advance) 모호하며 양극적인, 그 어떤 심리적 요소이다. 콤플렉스에서 보여준 융과 프로이트의 견해 차이는 상징에서도 그대로 재연된다. 수 없이 토론된 근친상간이라는 주제를 두고 한 번 살펴보자. 융은 프로이드식 경험주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동경을 현실적인 실제성에만 근거를 두고 이해한다는 것은 항상 그릇된 결론으로 이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융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른들에게도 근친상간은 보편적인 인간성의 표현이라고 간주한다. 영원히 순환하는 원형적 무의식의 낙원적 상태, 그 책임과 결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식처(은신처)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은 항상 기본적으로, 상징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태(자궁)로의 회귀라는 상징, 탁월한 상징은 아니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퇴행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크게 긍정적일 수도 있다. 실제의 어머니와 맺고 있는 개인적 유대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물학적 측면에서는 범죄적 행위로 간주되는 것이 상징적 측면에서는 의미 있고 때로는 필수적인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 융의 입장이다.<하략> >(Jolande Jacobi, Complex Archetype Symbol in the Psychology of C.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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