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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27. 2019

종교에 대하여

이웃과 원수

                                                                                                                                                                                                                                                                                                                                                                                                                                                                                                            

이웃과 원수


 기독교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일 것입니다. 그 말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저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사랑'보다 ‘원수’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 제게는 ‘원수’라 할 만한 존재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나이에 스스로 만든 ‘원수’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저 ‘미운 놈’ 정도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해 듣고는 내 ‘원수’가 누군지 곰곰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단 ‘도마렛(서라)!’을 외치는 왜놈 순사들을 꼽았고(만화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김일성 도당을 꼽았고, 그 다음엔 중공군… 그렇게 ‘원수’들을 정해 나갔습니다. 그 말이 진정한 호소력읗 가지게 되는, 제 개인적인 ‘원수’가 생기게 되는 것은 아주 오랜 뒤였습니다. 그것도 딱 한 명, '용서할 수 없는 자'가 생겼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자일 것 같았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언젠가 제가 그 자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을 아주 듣지 못했다면 어쩌면 그 자가 "원수"까지는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얼핏 스쳐지나갑니다. 



그 비슷한 일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듣고 난 뒤에도 일어났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웃’이라는 말이 그렇게 ‘가까운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웃사촌’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나서부터는 ‘이웃’은 결코 남이 아닐 것이라는 이상한(?) 신념 같은 것이 제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언젠가 토플러의 말을 빌려서 “네 이웃이 곧 세계다”라는 말을 전한 적도 있습니다만(사고는 글로벌(global)하게 하고 실천은 지역적(local)으로 하자), 기실 토플러의 그런 주장도 그 기원을 찾아가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두 말씀 다 “사랑하라”라는 술부가 중요한 말인데 저는 삐딱하게(?) 꼭 그 목적어에만 유념한 것 같습니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2% 부족하게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라는 루터 식 고뇌를 예수는 하지 않은 것 같다. ‘내 삶으로 인해 내 이웃의 삶이, 특히 가난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라고 예수는 고뇌한 것 같다. 이웃 종교인 불교나 도교 역시 이웃사랑을 강조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러나 니체에게 인간의 약함과 위선일 뿐이다. 독일 작가 하이네(Heine)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만일 하느님께서 나를 행복하게 하시려면, 내 원수 예닐곱을 나무에 못 박는 기쁨을 내게 주시기를… 인간은 그 원수를 사랑해야 하지만 원수들이 나무에 못 박히기 전에는 안 된다.” 하이네의 심정이 우리 심정이리라. 원수 사랑이 그리 쉬울까. 원수를 사랑함은 하느님의 완전함에 다가서는 행동이다. 하느님 사랑을 깊이 느끼지 못한 사람은 이웃 개념을 확장하기 어렵다. 하느님 사랑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성 노동자 여성도 세리도 박해하는 사람도 모두 이웃이 된다. 원수 사랑이 어렵다면 우선 이웃 개념을 넓힐 필요가 있겠다.[김근수, 『행동하는 예수』, 메디치, 2014] 


종교는 인생의 필수 모티프입니다. 그것을 아편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만, 그런 태도 역시 종교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종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성을 신과 같이 생각하면 이성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이성을 핑계로 물신을 숭배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생각해 보니 제 경우는 ‘왔다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 기복신앙에 치우쳐서 죄의식 없는 ‘바람(願望)’과 사랑 없는 ‘기원(祈願)’만을 일삼는 신앙 공동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마비된 이성’에 동정심이 입니다. 그러나 저라고 ‘마비된 이성’ 앞에서 예외인 것은 아닙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이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고통이 있을 때만 유독 신심(信心)이 돋습니다. 몸이 지독하게 아플 때만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제 이성을 마비시키고 눈물을 돋게 합니다. 참, 가증스런 존재입니다. 


좋은 책을 읽고 조금씩 읽을 때마다 반성적인 태도로 독후감을 써 본다는 것이 도를 넘겨서 주제넘은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보지 마시고, 제 글도 그저 ‘심심풀이 땅콩’이려니 하시고 가납(嘉納)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 이 글을 쓰면서 보는 오늘 <한국인의 밥상>은 사람을 많이 울리네요. 거제와 마산, 해녀 어머니와 해녀 딸, 두 사람을 이어주는 ‘어머니의 바다’와 미더덕 미역국 이야깁니다. 저에게도 그쪽 바다가 어머니의 바다였거든요. 이제 마산의 오동동도 나오네요. 옛날 제 나와바리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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