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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27. 2019

낙타와 바늘귀, 화투와 여자

비유란 무엇인가?

낙타와 바늘귀, 화투와 여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예수가 한 말입니다. 낙타가 사막 지역의 유용한 운송 수단이었고, 세례자 요한이 낙타 가죽으로 된 옷을 입었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그때의 낙타는 <가까이 있는 ‘큰놈’>들의 대표로, 일종의 환유로 발탁되었을 공산이(그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다만, 굳이 그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해야 할 만한 그 어떤 현실적 연결고리는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 비유가 번역 과정에서 ‘밧줄’을 ‘낙타’로 잘못 옮겨서 생긴 말이라고, 그 비유의 생경함을 흠잡으며,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고대의 성서 번역자가 아람어(예수가 산상의 설교를 할 때 썼던 언어) gamta(밧줄)를 gamla(낙타)와 혼동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그쪽 말에는 문외한인 저로서는 그 분석에 어떤 토도 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대로의 생각은 있습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낙타와 바늘귀’는 이미 비유의 소임과 방법, 그리고 효과를 천하 만방에 증명해 보인 ‘오래 기억되는’ 역사적 실재라는 겁니다. ‘(가느다란 실이 아니라) 뱃사람들이 쓰는 굵은 동아줄을 바늘귀로 집어넣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일이 더 쉬운 일일 것이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드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전달의 효과가(호소력이)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는(혹은 번역자는) 누구도 연결시키지 못한 두 개를 연결시켰습니다. ‘움직이는 것 중 가장 큰 생물’과 ‘구멍(통로) 중에서 가장 작은 구멍(통로)’을 ‘낙타와 바늘귀’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렇게 큰 동물은 아니지만 제법 덩치가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늘귀 앞에서 낙타와 동병상련합니다. 특히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자들은 불문곡직 자신을 ‘낙타’로 인식합니다(부자가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죄 짓지 않는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천국의 문은 바늘귀처럼 좁습니다. 절실한 사정에 딱 부합합니다. 거기서 변화의 싹이 틉니다. 그동안 모르던 세계가 눈에 보입니다. 보통 이런 식의 돌발적인 보조관념의 출현은 의식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의식이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순간에 자유롭게 연상되는 것입니다. 비유를 만드는 이의 돈독한 진정성이 그렇게 ‘순간의 선택’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비유가 세계를 확장합니다. 세계의 확장에 기여하지 못하는 비유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무엇이든 ‘고만고만’ 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잔잔한 호수에 큰돌을 던져넣어 파문을 일으켜야 합니다. 멀쩡히 고운 비단을 확 찢어야 합니다. 그렇게, 변하기 싫어하는 고정관념을 강제로 변하게 해야 합니다. 논리적인 설명이나 순탄한 인과관계 안에서 ‘설득’하는 것에 그친다면 이미 그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적어도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오도록 격려해온, 세계의 확장에 기여해 온, 그런 비유는 아닙니다.


연애에 대하여 (이성복)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싼다 숨막혀 죽겠어!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생각 하는 길을 껴안는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屍身을 밝히는 촛불들 
愛人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인터넷 블로그 검색)


이성복 시인의 「연애에 대하여」는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에 대한 오마쥬(Hommage, 존경, 존중을 뜻하는 프랑스어. 존경하는 작가와 작품에 영향을 받아 그와 비슷한 작품을 창작하거나 원작 그대로 표현하는 것), 또는 그것의 ‘이성복 버전’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시인이 비유를 얻는 방법은 ‘진정성’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성복의 시에는 남다른 ‘진정성’이 많이 발견됩니다. 이성복은 이상, 김수영, 황동규를 잇는 우리 시의 한 중요한 좌표입니다. 오래 기억되어 마땅한 시인입니다. 적어도 ‘진정성’에 관한 한 저희 세대 중에서는 누구도 그를 추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겐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들리는 여러 일화도 있지만 제가 확인해 줄 수 있는 이야기 하나만 하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모 공단 근로자들의 문예작품 심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와 산문(꽁트, 수기)으로 나누어 심사를 보고 각자 심사평을 써서 작품집에 실었습니다. 그러고 한참 뒤에 다시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성복 시인이 제게 한 말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제 심사평을 보고 난 소감이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약하겠습니다). 짧은 심사평이지만 공을 많이 들였더라며 자기는 그러질 못했는데 아쉽다면서 못난 후배를 격려했습니다. 가식을 멀리하는 이에게서만 볼 수 있는 어떤 아우라를 느꼈습니다. 고마운 가르침이었습니다.
「연애에 대하여」중에서는 1연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자만한 구멍’이 쑹쑹 뚫려있는 시인의 연심(戀心)이 직빵으로(?) 전달되어 왔습니다. 남자라면(여자도?) 누구나 그런 구멍 몇 개씩은 다 갖고 살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여자들이 ‘화투’까지 친답니다. 자기를 깔아뭉개고요. 마치 ‘여자는 다 속물(괴물?)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화투치는 여자’(착하지 않은 여자들?)와 이 시의 3연에서 소개되는 시인의, 「즐거운 편지」 투의 ‘연심’은 그야말로 ‘낙타와 바늘귀’의 관계인 셈입니다. 굳이 한 번 풀어 보자면, ‘화투나 치는 여자들을 제 멋대로 천사처럼 상상하는 놈은 평생 연애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가 되겠습니다. 세상의 여자를 다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본인이 덮어 써야죠. 구멍 쑹쑹 뚫린 놈들이 아무래도 ‘삶에 대한 진정성’ 부분에서 모종의 취약성을 드러낸 것이라 봐야 할 겁니다. 물론 ‘연애의 진정성’에 너무 맹목적으로 매달린 탓이지요.
어제 오늘, ‘간통죄’ 위헌 여부에 대해서 말이 많습니다. 아마 이 글이 독자를 만날 때 쯤이면 그 결과가 나와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성적 정체성 결정권을 국가가 관여해서 형사적으로 처벌한다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전문가들이 나와서 갑론을박하기도 하는군요. 문외한인 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물론 ‘생각’은 있습니다. ‘의리 없는 놈(년)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삼국지의 주제를 저는 좋아합니다. 물론, 제가 꼭 ‘의리 있는 놈’이라는 뜻은 아니고요. 좋아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한 것이 인생이니까요. 잘 나가다가 엉뚱한 곳으로 빠지는 느낌입니다. 낙타와 바늘귀, 예수님의 탁월한 비유 말씀에서 이성복 시인의 연애시까지는 좋았는데 마무리가 좀 쌍스럽습니다. 어제 얼핏 본 <착하지 않은 여자>라는 드라마가, 그 드라마에 나오는 화투치는 여자 주인공의 불운이, 별의 별 소리를 다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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