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키우기
칼의 신
일본 여행을 하다 보면 낯선 것들이 많다. 굳이 문화 충격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생경한 것 중의 하나가 수 없이 널려 있는 신사(神社)와 그 정문격인 도리(とり-い, 鳥居)다. 가는 곳마다 신사고 도리다. 그것 없이는 어떤 신성(神聖)에도 감히 우리가 접속, 접촉하지 못할 것이라는 어떤 강박 관념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그렇게 '거룩한 것들'이 필요한 인생들인가? 그렇게 샤머니즘이 절실한 까닭이 무엇일까? 신성이 지상에 강림하려면 활주로처럼 그것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다. 신사는 말 그대로 ‘신을 모시는 곳’이다. 땅에 있지만 땅 아닌 곳이 신사다. 신사 입구에 세워둔 도리의 두 기둥의 상단부는 날랜 새 날개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것의 형상과 이름이 새의 상징성을 환기하는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새를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보는 것이다. 마을 수호신의 상징으로 마을 입구에 세운, 끝에 나무로 깎은 새를 붙여 세운 장대인 우리나라의 솟대와 비슷한 형상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삼한시대 종교문화인 소도(蘇塗)를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도리를 거쳐서 들어가는 곳은 세속과 유리된 신성한 공간으로서 인간이 화를 면하고 복을 기원하고 갱생을 기구(祈求)하는 곳이다(죄를 씻어 주는 곳은 아닌 것 같다).
일본의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국조(國祖)신으로부터 지역의 수호신, 조상신, 문명신(文明神, 새로운 문물의 수입) 등, 구구각색, 각종 각양이다. 특별한 어떤 제약이 없이 신사 존립의 필요성이 있을 때마다 신(神)이 만들어진다. 야스쿠니가 전쟁 영웅(전사자)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신사인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학식이 뛰어났던 지역 인재가 있었으면 그를 ‘공부의 신’으로 모시기 위한 신사가 건립된다. 그런 인위적인 신사 중의 하나가 후쿠오카의 다자이후덴만궁(太宰府天満宮)이다. 다자이후텐만궁은 903년에 사망한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받드는 텐만궁의 총본산이다. 일본의 신사 가운데 규모가 크고 웅장한 편이며, 수령이 오래된 매화나무(飛梅)들이 있어서 더욱 인상적이다.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여서 입시철마다 합격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나에게 다자이후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안에 칼무덤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포정(庖丁)이 일본에서 유명한 칼 상표라는 것을 안 것은 좀 되었지만, 다자이후 안에 그 이름으로 된 칼무덤이 있다는 건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안 사실이었다. 학문의 신을 모신 곳이니 필총(筆塚, 붓무덤)이 있는 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칼무덤이 또 있다는 것이 요령부득이었다. ‘포정총(庖丁塚)’라고 글자를 새긴 큰 돌비석까지 있었다. 쓰다가 버리는 칼을 그냥 버리지 않고 포정이라는 칼의 신이 관할하는 곳 한군데에다 모아서 버린다는 건데 그 발상이 좀 웃겼다. 포정은 재물신으로 추앙되는 관운장처럼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다. 장자의 우화에 나오는 등장인물(관념의 화신)이다. 그러니까 그 경우는 실존 인물을 신격화한 것이 아니라, 허구의 인물을 신으로 모셔온 케이스다. 이중으로 각색이 되었다는 거다. 포정해우(庖丁解牛)는 우화다. 장자의 정치철학(養生之道)이다. 포정의 소 잡는 칼이 19년을 써도 방금 숫돌에 간 칼처럼 생생했던 것은 칼이 원래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순리(順理)로 칼을 썼기 때문이었다(그렇게 정치를 하라는 뜻이다). 억지로 힘줄을 자르지도 않았고 뼈를 도막내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칼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칼 쓰는 법, 칼 쓰는 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장자의 포정해우다. 그러니, 포정의 이름 아래 묻혀야 할 것은 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다. 사람 묻을 곳에 칼을 묻다니, 아마 ‘포정’이라는 이름이 칼의 대명사로 굳어진 탓에 그런 일이(웃지못할!) 벌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실소를 머금을 일이지만, 무엇이든 교훈이 될 만한 것은 죄다 가져다 유용하게 쓰고자 하는 그 고심(苦心) 천만(千萬)은 가상한 면이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그런 걸 잘 한다. 일전(日前)에 다카나베 스스무(高鍋進)라는 일본의 검도 선수 이야기를 동영상과 함께 페북에 올린 적이 있다. 2010, 2011년도 전일본 검도선수권자이니 가히 검신(劍神)이라 부를 만한 실력자다. 포정처럼 그도 칼의 신이다. 전일본 연패(連覇) 기록은 현재 그가 소속되어있는 가나가와현 경찰검도부 감독인 미야자키 마사히로(宮崎正裕) 8단이 딱 한 번 수립했을 뿐이다. 미야자키 8단은 전일본 통산 6회 우승의 신화적인 기록을 가진 사람이다. 전설적인 검호(劍豪) 미야모도 무사시(宮本武藏)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그와의 시합에서 승리를 장담하지는 못할 것이라 할 만큼 검도의 귀재(鬼才)다. 전후 60년 역사상 전일본검도대회에서 두 번, 세 번 우승을 한 사람은 간혹 있지만 연속으로 우승을 한 사람은 현재로는 그들 사제지간밖에는 없다.
현재 만 35세인 다카나베 선수는 자타공인의 정통파 검객이다. 어디서든 정통파가 대접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검도계에서는 특히 그런 풍조가 더 강하다. 미야자키 8단이 전무후무한 검도의 귀재라는 건 다 인정하지만, 그는 정통파 검객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시다 토시야(石田利也) 선수가 승수(전일본 2회 우승)와 승률에서는 비록 그에게 크게 밀렸지만 은근히 당대 제일검으로 통했던 것은 그가 정통파 검객이었기 때문이었다(오오사카 경찰이었던 그가 경시청의 쟁쟁한 검객들을 젖히고 경찰대학 교수로 발탁된 것도 그의 정통파 검풍과도 연관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광석화와 같은 머리치기를 주특기로 하고 있는 정통파 검객에 준수한 용모까지 갖춘 다카나베 선수는 충분히 스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준수한 용모는 스타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그는 늘 정상을 앞에 두고 좌절했다. 칼은 빨랐지만 담력이 약해서 상대의 선공(先攻)에 본능적으로 칼을 올려 수비자세를 취하다 역공을 당하곤 했다. 언제나 우승후보 1,2위에 꼽히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해 분루를 삼켜야 했다. 검도에는 일안(一眼) 이족(二足) 삼담(三膽) 사력(四力)이라는 말이 있다. 첫째는 눈이 빨라야 하고(先), 둘째는 발(距離), 셋째가 용기, 넷째가 속도라는 것이다. 그는 칼도 곧고, 눈도 빠르고, 발놀림도 좋았지만 담력이 약했다.
결정적으로, 세계 대회 때 미국 선수에게 패함으로써 우승을 한국에 넘겨주는데 그가 기여함으로써 그의 검도 인생은 일생일대의 좌절을 맞이한다. 현재 세계 검도계는 한국과 일본이 그 세를 양분하고 있다. 늘 결승전에서 두 나라가 겨룬다. 그리고 한 번도 일본이 우리에게 진 적이 없다. 그런데 13회 대회 준결승에서, 화교 출신으로 주로 일본인 스승에게서 검도를 연마한 미국 선수(YANG)에게 일본 선수(다카나베)가 패하고 만 것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결승전은 싱겁게 끝났다. 한국이 미국을 이기고 세계 검도 대회 사상 최초로 우승을 한 것이다. 사정이 그러니, 다카나베 선수의 입장이 말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사면초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그와 그의 가족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결과가 말해주듯이, 다카나베 선수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14회 세계대회에도 그의 실력을 인정한 스승들의 추천으로 일본 대표선수로 발탁되어 당당히 일본의 우승에 기여하고, 돌아와서는 보란 듯이 전일본선수권을 거머쥔다. 그리고는 그 다음해 그 어렵다는 전일본선수권 연패의 업적도 달성한다. 우리 나이로 37세 때 드디어 스타가 된 것이다(그 나이는 대개 선수 생활을 접고 코치나 감독으로 물러앉을 때다). 매스컴에서 그를 불러 ‘다카나베의 머리치기 비결을 공개한다’라는 프로를 만들고, 전국 각처에서 공개 지도 요청이 봇물 터지듯 밀려오고,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외국에서도 그를 초정하기 위해서 줄을 서고 있다는 소식이다.
10여년 그의 성장을 멀리서나마 지켜본 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는 전형적으로 ‘만들어진 스타’다. ‘포정(庖丁)’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리(鳥居)를 세우고 신사(神社)를 짓기 위해서 어거지로 만든 신(神), 가공된 ‘칼의 신’인 것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다. 우리 같으면 벌서 버려도 몇 번을 버렸을 카드를 일본 사람들은 끝까지 배팅을 해서 물건으로, 결국은 이기는 패로 만든다. 그리고 그 패 앞에서는 모두 죽는 시늉을 한다. 그런 ‘작업’에 스승과 동료 모두가 일심단결, 사심 없이 끝까지 동참한다. 누군들 스타가 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스승과 관중들이 선택한 ‘아깝게 한 번 죽은 패’를 다시 살리는데 그 동료들이 합심해서 동참하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어떻게 보면 질린다(그가 첫 번째 전일본에서 우승을 차지할 때, 그가 친 머리는 정확하게 상대의 머리에 가 닿지 않았다. 상대가 죽도를 들어 막았다. 그의 칼이 너무 빠르기도 했지만, 마치 심판들이 그의 칼이 언제 뻗어 나오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일심동체로 일제히 깃발을 들었다. 기회가 좋았다는 후일담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꼭 신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그들의 집단심리가 무섭기도 하다. 꼭 그런 자들이 사고를 치면 크게 치기 때문이다. 그래도 딱히 그렇게 나쁘게만은 보고 싶지가 않다. 가능성이 있는 젊은이에게는 다시 기회를 줘서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항상 배려해야 한다는 것, 어디까지나 실수와 실력을 구분해서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 무언가 상징이 요구될 때는 합심해서 그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죽었다 다시 산 자가 진정한 신이 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뭐 그런 식의 인문주의자들(?)의 어떤 결기(決氣)를 보는 것 같아서 딱히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