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출구
왼손잡이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요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 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요”
뜻 모를 감동을 주던, 이상의 시 「거울」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고1 때였다. 조악하게 제본된 사이비 국어책, 생긴 것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높은 가격이 매겨진, 그 황당한 부교재(副敎材) 안에서 그 시를 처음 만났다(그 황당한 부교재에 얽힌 사연은 뒤에 따로 설명한다). 이상의 명작 수필 「권태」도 거기서 처음 읽었다. 생긴 것과는 달리 그 책에는 명문장이 많았다. 특히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요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요’라는 「거울」의 한 구절이 오래토록 기억에 남는다. 수십 년 동안 잊혀지지 않는 이 구절은 시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내 일상의 무의미한 ‘왼손잡이 류(類)’와도 모종의 내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부분 왼손잡이다. 돈(지폐)를 셀 때, 자전거를 끌고 갈 때, 커피 잔을 들 때, 시험지를 매길(넘길) 때, 현관문이나 방문을 열 때, 또 누군가(무엇인가)를 애무할 때(이성이든 동물이든), 나는 왼손잡이가 된다. 요즘 하나 더 늘었다. 나이 들어 햇볕을 가리거나 머리에 찬 기운이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모자를 쓰는 일이 자주 있는데 가까운 이들에게 거수경례를 할 때 왼손으로 한다. 매번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기도 그렇고 손만 번쩍 들어서 아는 체를 하기도 그렇고 해서 거수경례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왼손이 올라간다. 그러니까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는 아니다. 나름대로 세상과 통하는 하나의 출구가 되는 왼손잡이다.
방금 안 것들도 있다. 찻집에 앉아서 가방을 내려놓을 때도 꼭 왼쪽에 둔다. 안경도 벗으면 왼쪽에 둔다. 지금처럼 책을 보며 글을 쓸 때도 책은 왼쪽에 놓여 있다. 그러고 보니 식탁에 올라온 반찬 중에서도 상찬(上饌)은 자작 항상 왼쪽으로 조정한다. 아내도 나의 그런 습성을 안 뒤로는 대체로 그렇게 진열한다. 조금 예외적인 것도 있다. 아내는 지금도 국그릇을 내 밥그릇 왼쪽에 둔다. 이상한 왼손잡이다. 그래서 식사 때마다 매번 내가 다시 조정한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그냥 두는 수도 많다. 오늘 아침에도 그냥 왼쪽에 둔 채로 식사를 마쳤다.
꼭 의미를 둘 것도 아닌데 언제부턴가 나는 내 왼손잡이를 모종의 출구로 여기는 것 같다.무척 아낀다. 오늘은 성당 근처 찻집에서 아내를 기다리며 카프카의 「학술원에의 보고」를 읽었다. 그의 ‘출구’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싶었다.
.....제가 출구란 말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 똑바로 이해받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저는 이 말을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빈틈없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일부러 자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방을 향해 열려 있는 자유라는 저 위대한 감정을 뜻하는 게 아니거든요. 원숭이였을 때 저는 아마도 그런 감정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인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때도 오늘날도 자유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유로써 사람들은 인간들 가운데서 너무도 자주 기만당합니다. 그리고 자유가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로 헤아려지는 것과 같이, 그에 상응하는 착각 역시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입니다.
아닙니다, 자유는 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의 출구를 오른쪽, 왼쪽, 그 어디로든 간에, 저는 다른 요구는 하지 않았습니다. 출구 또한 비록 하나의 착각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요구는 작았습니다. 착각이 더 크지는 않을 테지요. 계속 나아가자, 계속 나아가자! 계속 나아가자! 궤짝벽에 몸을 눌러붙인 채 팔을 쳐들고 가만히 서 있지만은 말아야지.
제가 이 사람들의 테두리 안에서 얻은 평정이 저를, 무엇보다 온갖 도망치려는 시도로부터 막아주었습니다. 오늘날로부터 보건대 저는 최소한 살고자 한다면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 출구는 도망쳐서는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하기라도 했던 것 같습니다. 도망이 가능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믿고 있습니다, 원숭이는 언제나 도망칠 수 있다고요. [프란츠 카프카(전영애 옮김), 「학술원에의 보고」 중에서]
약간 횡설수설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는 있지만 카프카는 ‘출구’라는 말을 통해서 인간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보자는 제안을 던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출구’는 나가는 곳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원숭이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변신해야 출구를 원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카프카는 원숭이 인간을 상정하고 원숭이와 인간 사이를 오간다. 그렇다. 인간은 매인 존재다. 누구든 자기 밥상 위의 국그릇의 위치를 조정하는 것처럼 자기 삶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직 신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인간은 그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할 뿐이다.
고등학교 때의 <국어 부교재>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나중에 고교 은사님들이 주도하던 직장(입시학원)에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은사님 중 한 분의 친구가 학교 근처에서 교재와 문방구를 파는 작은 서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근에 큰 서점이 하나 생기면서 서점 형편이 무척 어렵게 되었다. 큰 서점의 물량 공세에 밀려 궁지에 몰린 것이다. 출구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어 하루에 라면 두 개로 끼니를 잇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사정을 안 교사 친구가 궁여지책으로 국어 부교재를 하나 만들어 책방 친구를 돕게 되었다. 정작 서점 주인의 친구는 지리 교사였는데 친한 후배 중에 국어 교사가 있었고 그 국어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치던 분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서(독점적으로 부교재를 팔아서) 그 친구를 도왔다. 위기를 넘긴 그 서점 주인은 그 뒤 때를 얻어(후에 일기 시작한 전국 규모의 모의고사 시스템의 지역 대리점을 얻었다) 큰 부자가 된다. 몇 년 사이에 큰 돈을 벌어 빌딩도 올리고, 사립학교도 사서 아들에게 교장직을 맡기고, 규모가 큰 입시학원을 만들어서 거의 재벌급으로 성장한다(그 뒤 교사 친구들에게 후한 보상을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성공은 지금도 곧잘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곤 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턱없이 비쌌던 싸구려 책이 여러 사람의 출구가 된 것 같다.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내게도 작은 한 출구를 보여준 것이다. 문학이라는 출구.
사족 한 마디. 사람은 평생 동안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르고 살다가는 존재다. 부모가 있을 때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가 다 세상을 뜨면 갑자기 세상이 헐렁해진다. 우주의 근원과 연결된 영혼의 탯줄 같은 것이 끊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느낌은 조실부모한 사람에게 더 심하게 다가온다. 종종 혼자된 느낌을 견디기가 어렵다. 처절한 외로움의 얼굴에 직면한다. 오늘 새벽에 깨서 이 글을 쓰면서도 그렇다. <오래 전 작성. 오늘 아침 일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