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는 백설공주가 아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독서 교육은 결국 ‘어떻게 읽을 것인가?’로 귀결됩니다. 아무리 좋은 책을 주어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책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좋은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저절로 훌륭한 독서가가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론’(독서교육론)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교사 입장에서 손 놓고 볼 수만도 없는 일입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하고,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일 방법을 강구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구조주의자 츠베탕 토도로프는 비평의 태도와 방향을 투사적, 해설적, 시학적으로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단순화시켜 독서의 위계를 투사적, 해설적, 시학적으로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보이는 것, 읽고 싶은 것만 읽는 단계가 있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의미만을 공유 혹은 재생산해 내면서 성실히 텍스트가 요구하는(요구한다고 여겨지는) 작업만을 수행하는 단계가 있고, 마지막으로 독자가 창의적으로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창출하는 단계가 있다고 보고 싶습니다. 또 같은 구조주의자였던 롤랑 바르트는 ‘쓰기로서의 읽기’를 주창해서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독서만이 진정한 독서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꼭 ‘시학적 독서’나 ‘쓰기로서의 읽기’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투사 단계에서도, 해설 단계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독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독서의 목적에 따라서, 혹은 독자의 수준에 따라서 과도한 의미화가 오히려 비교육적, 비생산적일 수도 있습니다.
3.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텍스트는 『백설공주』입니다. 서양의 전래동화인 『백설공주』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백설공주가 사실은 공주가 아니었다라고 주장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저 ‘새하얀 눈 아이’라고 해야 될 것을 여왕(왕비)의 딸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공주’라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지적입니다. 원전 어디에도 공주(Prinzessin)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남녀(부모)의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눈처럼 새하얗고, 피처럼 붉고, 창틀의 나무처럼 검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이라는 주술적인 ‘여왕의 바람’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백설공주였다는 점을 들어 그런 주장을 펼칩니다(‘사랑’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좀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여왕의 바람’을 ‘눈처럼 살갗이 희고, 피처럼 입술이 붉고, 창틀의 나무처럼 머리카락이 검은 아이’로 이해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백설공주’를 ‘새하얀 눈 아이’로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가 발생합니다. 그 부분에서 발생한 ‘오해’가 투사적인 독서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눈처럼 새하얗고, 피처럼 붉은’ 아이를 살펴봤으니, 드디어 “창틀의 나무처럼 검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을 곱씹어 볼 때가 되었네요.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을 도움대로 삼아, 이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도록 합시다. 앞에서 우리는 ‘눈’은 어느 동아리에 속하고, ‘피’는 또 어디에 속하는지를 파헤쳐봤어요. 그러면 ‘창틀의 나무’는 어느 동아리죠? 그 나무는 무슨 색깔을 띠고 있죠? 흰빛인 하늘, 붉은 빛인 사람이 이미 나왔으니 이제 뭐가 남았죠? 하늘과 사람에 견줄 만한 동아리가 뭐가 있죠? 하늘과 사람 빼고 나면, 뭐가 남죠? 그래요 땅이에요. ‘하늘·사람·땅’ 이제 아귀가 맞네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세 색을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고, 독일의 한 학자도 그렇게 느꼈다는 걸 알리고 싶네요. 『그림 형제의 옛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Was Grimmsche Märchen erzählen』를 지은 쿠르트 슈티아스니Kurt Stiasny가 그예요. 그는 이 책에서 “원리 속에 있는 헤아림의 얼개(사유체계)는, 색의 상징을 통해 이 이야기 처음부터 보이고 있다. 검정은 어둠의 색을, ‘새하얀’은 빛의 색을, 여기에 붉은 색이 함께 하는데, 그것은 피의 색 즉 생명의 색을 뜻한다”라고 밝혔어요. (이양호,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글숲산책, 2008, 116~117쪽)
인용문의 요점은, 백설공주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한 몸에 품고 태어난 특별한 존재라는 설명입니다. 백적흑(白赤黑) 삼색이 고작, 태어날 아이의 겉모습(얼굴)의 특징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에 유의해야 <Snowwhite(Sneewittchen)>의 올바른 독해(번역)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4. ‘백설공주가 공주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충분히 ‘시학적’일 수 있습니다. ‘백설 이야기’를 경전처럼 읽어야 한다는 취지도 이해가 됩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전승된 이야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전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심청가>도 그렇지 않습니까? 심청이를 단순한 희생양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큰 제사장(大祭主)으로 보는 것은 상식입니다(그렇다면 백설은 누구의 한을 풀어주는 큰 제사장일까요?). 그렇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 독자의 수준, 독서의 목적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몰입하거나 과도하게 분석하는 행위는 결국은 또 다른 투사적 독서로 전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작품의 ‘감동의 폭’을 크게 제한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에게만 의미 있고 자신에게만 보람 있는 독서일 뿐,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인 효용성은 크게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문적인 용어로 말씀드린다면, 집단무의식적 차원에서의 ‘텍스트 무의식’의 활동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 버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5. 독일어 ‘Märchen’이 동화(童話)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림 형제의 옛이야기는 한때 유행했던 ‘잔혹 동화’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 옛이야기는 당대의 민중적 삶이 상당 부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민중들의 ‘자기 합리화’가 문맥 도처에 ‘꽁꽁’ 숨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그들 옛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신체 일부 먹기나 피 마시기’ 모티프는(「빨간 모자」에서도 나오죠?) 비록 그것이 악인이나 마녀에 의해서 행해지는 악행임이 강조되지만, 식량난으로 인해 생긴 당시의 식인(食人) 풍습을 어떤 식으로든 무마(합리화?) 해보겠다는 다중의 방어기제가 작동된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