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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21. 2019

고양이 상징

예술의 틀

고양이를 부탁해


고양이는 상징입니다. 우리 주변의 오래된 것들 중 호오나 귀천이 명백하게 갈리는 것들은 대개 상징입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엄청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싫어하는 이들은 죽자고 고양이를 멀리 합니다. 길고양이 양육을 둘러싼 인간사회의 갈등도 만만치 않습니다. 저는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평생 고양이와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젊어서 고양이를 키울 때에는 고양이에게 평화보다는 고통을 더 많이 준 것 같습니다. 한 마리도 집 안에서 제 수명을 다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 불화의 기억을 묶어서 <고양이 키우기>라는 소설 비슷한 것도 한 편 쓰기도 했습니다.

요즘 들어서 얼굴 생긴 모습을 두고 ‘고양이과’니 ‘돼지과’니 ‘개과’니 하는 말들이 돌아다닙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과거의 ‘여우’와 ‘곰’이라는 대비 대신 사용되는 말 것 같기도 합니다. 짐작입니다만, 얼굴은 ‘고양이과’로 생기고 하는 짓은 ‘여우’ 비슷하면 인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젊은 남자들이 특히 그런 타입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가까운 이 중에 노총각이 한 사람 있는데 그의 배우자관을 가만히 들어보면 결국은 일외모 이직업이었습니다. 좀 살아보면 그 모든 외물들이 헛되고 헛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될텐데 젊어서는 그걸 잘 모릅니다. 일건강 이성품 삼의리라는 걸 아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걸 잘 모릅니다. 그저 겉모습, 틀에만 집착합니다.

그렇다고 틀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살다 보면 어디서든 내용물을 규정짓는 ‘틀’이라는 것들을 만납니다. 인간 역시 ‘틀의 존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내용’이라는 것도 그 ‘틀’이라는 형식이 만들어내는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자주 듭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사람에게 주어진 일차적인 ‘틀’은 외모(外貌)와 체격입니다. 뭐니뭐니해도 그 부분에서 인간의 우열이 처음 판가름됩니다. 타고 나는 것이니 노력으로 얻는 것들보다 가치가 훨씬 높습니다.젊으나 늙으나 여성(女性)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평가)이 “당신은 예쁘다”라는, 타고난 ‘외모(틀)’에 대한 찬사(讚辭)입니다. “능력 있다”, “돈 많아 보인다”, “글 잘 쓴다”, “남편 잘 만났다”와 같은 찬사는 그 다음 순서입니다. “당신 섹시하다”, “나이 들수록 우아해진다”, “입는 옷마다 잘 어울린다”와 같은 찬사가 진짜 기분좋은 찬사입니다. 일찌기 그리스 신화에서 그 내용을 정확하게 확인한 바가 있습니다. 아프로디테에게 던져진 패리스의 사과가 그것입니다. 남자가 제일 숭배하는 것이 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이야기였지요. 삶의 완성도도 그렇습니다. 마지막은 결국 미추(美醜)로 가는 것 같습니다.

많이 우회했습니다만,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말은 사실 ‘예술적 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술에서도 ‘틀’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언젠가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에 대한 짤막한 소견을 한 번 적은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들 읽을거리로 쓴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영화에서 주제를 만들어내는 ‘틀’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바로 ‘고양이’입니다. 제목에서 한 번, 작중 등장인물(소품)로 한 번, 고양이는 그렇게 ‘틀’의 역할을 성수(成遂)해 내고 있습니다. 오갈 데 없는 어린 청춘들의 신세를 ‘깜찍하게’ 환유해 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감독은 그것에 지나친 상징성을 부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지만, 무엇에서든 ‘의미’를 찾아내고 싶은 독자(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틀’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도 보기 드물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예술에서의 ‘틀’이란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외적 시점으로부터 내적 시점으로의 이동과 내적 시점으로부터 외적 시점으로의 이동은 회화에 있어서 하나의 자연적인 틀로 생각될 수 있다. 이와 동일한 현상은 문학 작품에서도 지적될 수 있다.(중략)
틀의 기능은 이야기의 끝에서, 1인칭 서술이 3인칭 서술로 이동할 때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기법은 푸시킨에 의해서 『대위의 딸』에서 사용되었는데, 거기에서 주인공인 그리네프는 1인칭으로 그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3인칭으로 그리네프에 대해 이야기하는 ‘출판업자’는 에필로그를 제시한다. 앞에 든 모든 예에서 내적인 위치로부터 외적인 위치로의 이동은 틀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예술적 텍스트를 지각하는 과정에서 틀이 지니는 중요성은 우리가 서사물의 거짓-결말과 같은 특징적인 장치들을 고려할 때 분명해진다. 서술이 계속 진행되려고 할 때 정지의 느낌을 받는 것은, 틀을 짓는 형식적인 장치들 가운데 하나가 그 서사물이 진행되는 도중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보통 헤피 엔딩의 영화에서는 두 연인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을 때 포옹을 하는 장면에 의해 거짓-결말의 효과가 나타난다. 행복한 결말의 장치는 일종의 ‘행위의 중지’를 나타낸다. 틀의 기능을 획득하는 것이다. 문학에서 이러한 효과는 외적인 시점으로의 다양한 이동을 통해서 산출된다. 예를 들면, 이야기 안에서, 작가적 시점의 지배적 재현이 멈추었을 때가 그렇다. 대체로 주인공의 죽음은 작품의 결말을 알려주는 기호가 된다.(중략)
작품을 완결짓는 또 다른 장치는 시간의 완전한 정지다. 이 점에 대해서 리하체프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 이야기는 번영, 결혼, 죽음, 축제 등 더 이상 나올 사건이 없다고 하는 진술과 더불어 끝을 맺는다… 마지막 번영은 동화적 시간의 끝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고골리의 『검찰관』의 마지막 장면인 움직임이 없는 순간을 들 수 있는데, 거기에서 모든 인물들은 고정된 자세로 고정되어서, 시간의 전적인 정지를 의미하고 따라서 틀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은 콘스타블이 청중들에게 “당신은 누구를 비웃고 있나요?” 라고 말할 때 그가 극적인 공간의 제한을 파괴하는 것과 일치한다(청중들은 행위가 진행되는 동안에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 [Boris Uspensky, Valentina Zavarin and Susan Wittig trans., A Poetics of Composition, Univ. of California Press, 1973. pp140-150]

인용문의 설명에 따라서 ‘고양이 틀’을 이해해 보겠습니다. 이를테면,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의 행위가 ‘고양이’ 상징 속으로 흡수되면서 행위의 의미화가 추진되고, 이윽고 시간이 멈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의 정지’가 초래되고, 작품은 자연스럽게 ‘완결’의 구조를 성취하고요. 그러므로 ‘고양이’가 없다면(보호를 필요로 하는) 이 영화의 ‘종결’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서 ‘고양이’는 ‘의미’ 이상의 무거운 상징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없다면 어쩌면 이 영화는 ‘예술’로 편입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작지만 필수적인 하나의 ‘틀’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어린 고양이였습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의 고양이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미 고양이는 우리 시대의 한 ‘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깜찍스런 자태는 그 자체로 예술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고양이 사진들을 보면 그걸 알 수 있지요. 특별한 애완용을 제외하면 고양이의 교환가치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용가치 역시 미미합니다. 아직도 쌀집에서는 고양이를 ‘쥐 파수꾼’으로 쓸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도 희귀한 예가 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보통 개와 비교되면서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를 환유하는 것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고양이의 ‘장소에 대한 집착’을 이야기하고 그것의 성정을 폄하하는 식이었지요. 그것이 고양이 ‘기호’의 대중적인 의미였습니다. 요즘은 그 반대로 흘러가는 양상입니다. 길고양이가 늘면 늘수록 고양이가 훨씬 더 ‘동물귀족’ 취급을 받습니다. ‘틀’의 기능이 훨신 더 강화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고양이의 행태는 마치 노마드의 삶을 연상시킵니다. 그들의 역할은 우리들의 ‘홈패인 공간’에 활력과 소생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공간 창조자’의 그것입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사막과 초원, 대양과 같은 ‘매끄러운 공간’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 속에서 그런 공간을 보며 우리의 막혀서 답답한 삶을 위로받습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자기가 어떤 ‘틀’ 속에 들어가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밝은 곳, 어두운 곳, 조용한 곳, 시끄러운 곳, 편안한 곳, 불편한 곳, 모여사는 곳, 뿔뿔이 흩어져 사는 곳, 존엄을 가지고 사는 곳, 비굴하게 사는 곳, 우리가 처하는 그 모든 공간이 우리 인생의 ‘틀’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우리가 어떤 ‘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뿐입니다. 때론 그 상반된 삶을 나누는 경계선들이 아주 얇고 낮고 희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틀’이라는 생각을 할 때 그것들은 ‘무거운 상징’으로 내게 다가옵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불가의 교훈을 굳이 동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내 ‘틀’을 어떤 것으로 잡을 것인가가 결국 인생을 좌우합니다. 거꾸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공고한 것,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결국 그 모든 것이 한갓 ‘틀’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풀릴 때가 많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이 조잡하고 불순한 육신과 함께 썩어문드러질, 한 때 반짝할 뿐인, 삶의 틀, 기포와 같이 증발하고 말, 고양이 얼굴과 같은, 순식간의 외양 아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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