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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18. 2019

사냥이 끝나면

사기열전

<사냥이 끝나면>

....사람 사는 게 무궁무진 한 것 같아도 결국 거기서 거긴 것 같습니다. 겪은 일 또 겪고, 보던 인물 또 봅니다. 천 년 전의 일도 어제 오늘의 일이고 천 년 전의 인물도 어제 오늘의 인물입니다. 최근에는 유방과 한신의 일화에서 나온 '토사구팽'이 자주 떠오릅니다. 누가 개를 부리던 사냥꾼이고 누가 토끼잡던 개인지 헛갈릴 때가 있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토사구팽은 오늘날의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옛날 글쓰기를 한 번 다시 호출해 봅니다.


* 사마천의 『사기 열전』은 중국의 역사서지만 그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 책이다. 구술(口述), 구전(口傳)으로 이어지던 이야기가 비로소 기록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사기 열전』이다. 그야말로, 이야기 문화의 새 장(章)을 연 것이 『사기 열전』인 것이다. 그런 연유로 동아시아 서사문학은 『사기 열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후의 모든 전기(傳記), 전기(傳奇)류는 한결같이 그것에 뿌리를 둔다. 당연히 소설도 그렇다. 소설이 점차 신변잡기적 사적(私的) 글쓰기로, 신기(新奇)와 진설(珍說) 쪽으로만 치우치는 세간의 정황을 볼 때마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사기 열전』 생각이 난다. 역사적 안목을 통한 인간탐구라는 이야기의 본령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사기 열전』은 인간탐구다. 한 인간의 삶을 통해 그와 함께 했던 시간(역사)을 평가한다. 그게 전(傳)이다. 전을 통한 사마천의 인간탐구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항상 이야기의 배면(背面)을 흐른다. 물론 사마천에게는 나름의 답이 있다. 때를 만나면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인간에게 요구되는 도리는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 한다. 다양한 해답이 있을 것 같지만, 그 두 가지 원칙이 근본(根本) 해답이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여러 가지 인물형을 묘사한다. 때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시간을 비껴가는 자와 거스르는 자, 시대를 타고 솟는 자와 그것을 뒤흔들고 바꾸어 놓는 자, 그러면서 성공하고 실패하는, 인간 군상의 삶들을 고스란히 나열한다. 그렇게 나열된 것들이 서로 비교될 때 그가 생각하는 두 개의 근본 해답, ‘때와 도리’의 변증법도 자연스럽게 돌출될 것이라고 여긴 듯하다. 그것이 또 열전(列傳)의 근본 취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한다. 그런 인물 묘사를 통해 선택과 갈등 자체가 삶의 본연의 모습임을 강조한다. <위기-해결>의 갈등구조, 그러한 열전의 소설적 구성 역시 그런 사마천의 인생관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사기』 130편 가운데 인물 전기(傳記)로 구성된 것이 112편인데, 이 중에서 57편이 비극적 인물의 이름으로 편명을 삼았다. 그리고 20여 편은 비극적인 인물로 표제를 삼지는 않았으나, 따져 보면 비극적인 이야기다. 나머지 70여 편에도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편에서 비운의 인물이 등장한다. 격동의 시대를 약 120여 명이라는 비운의 인물을 통해 그려 냈으니 결국 사마천에게는 ‘비극’이야말로 시대의 표징이었던 셈이다.
한 개인의 기록인 역사서 『사기』가 후대 24사(史)의 필두로 거론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무제까지 이르는 유일한 통사체 역사서인 것이 첫째 이유다. 또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의 정확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절대 군주 위주로 재편되는 엄혹한 현실에 직면해서, 사회역사적 관점에서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추구한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태도가 다른 역사서를 압도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이에 더하여 『사기』가 문학서로서의 의의와 가치도 함유하고 있다는 점도 그 가치를 높이는 한 가지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원중, 『사기 열전』 「해제」 참조]

『사기 열전』 에 나오는 한나라 장수 한신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은 한고조 유방은 결국 경쟁자인 그를 제거하지만 그 과정이 단순하지만은 않다. 한신(韓信: ?~BC 196)은 회음(淮陰) 출생으로 초(楚)나라에서 중용되지 않자 한왕(漢王)의 군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운다. 초왕 항우를 포위해 ‘사면초가’라는 고사성어가 나오게 한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후일 초왕(楚王)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한제국의 권력이 확립된 후 여후(呂后)에 의해 주살되었다. 한신이 죽고 1년 뒤 유방도 죽는데, 유방과 한신의 인물됨을 비교하기 위해서, 그들 두 사람이 각자에게 닥친 <위기-해결>의 국면을 어떻게 돌파해 나가는지, 사마천이 제시하고 있는 서사의 갈등구조를 보면 『사기 열전』의 서술구조가 어떠한지, 그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고제(高帝, 漢高祖 劉邦: BC 256~195)는 진평의 계책에 따라 천자가 순행한다고 하면서 제후들을 모두 불러 모으기로 했다. 남쪽에 운몽(雲夢)이라는 큰 호수가 있었다. 고조는 사자를 보내 제후들에게 거짓으로 이렇게 말하게 했다.
“진(陳)으로 모두 모이시오. 내가 앞으로 운몽으로 갈 것이오.”
사실은 한신을 습격하려고 한 것이지만 한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고조가 초나라에 이를 무렵, 한신은 병사를 일으켜 모반하려고 했다. 그러나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겨 고조를 만나려고 하면서도 사로잡히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한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리매의 목을 잘라 황제를 뵈면 황제께서 반드시 기뻐할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신이 종리매를 만나 상의하자, 종리매는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가 초나라를 쳐서 빼앗지 않는 까닭은 내가 당신 밑에 있기 때문이오. 만일 당신이 나를 잡아 자진해서 한나라에 잘 보이려고 한다면 나는 오늘이라도 죽겠소. 그러나 당신도 뒤따라 망할 것이오.”
그러고는 한신에게 호통을 쳤다.
“당신은 훌륭한 인물이 아니오.”
그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신은 그의 목을 가지고 진으로 가서 고조를 만났다. 그러자 고조는 무사를 시켜 한신을 묶게 하고 뒷수레에 실었다. 한신이 말했다.
“정말 사람들의 말에 ‘날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죽이고,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버린다. 적을 깨뜨리고 나면 지모 있는 신하는 죽게 된다.’라고 하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삶겨 죽는 것은 당연하구나!”
황제가 말했다.
“그대가 모반했다고 밀고한 사람이 있소.”
드디어 한신의 손발에 차꼬와 수갑을 채웠다. 낙양에 이른 뒤에야 한신의 죄를 용서하고 회음후로 삼았다.
한신은 한나라 왕이 자기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을 알았으므로 언제나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도 않고 수행하지도 않았다. 한신은 이로부터 날마다 고조를 원망하며 불만을 품고 강후(絳侯) 주발(周勃)이나 관영(灌嬰) 등과 동급의 자리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중략]
한나라 10년에 정말로 진희가 모반하자 고조는 장수가 되어 직접 치러 갔다. 한신은 병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진희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렇게 말했다.
“군사를 일으키면 내가 여기서 그대를 돕겠소.”
한신은 그의 가신들과 짜고 밤에 거짓 조서를 내려 각 관아의 죄인들과 관노를 풀어 주고, 이들을 동원해서 여후(呂后, 유방의 처)와 태자를 습격하려 했다. 각기 맡을 부서가 정해지고 진희의 회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한신의 가신 가운데 한신에게 죄를 지은 자가 있어 한신이 잡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그 가신의 아우가 여후에게 변고를 알리고 한신이 모반하려는 상황을 말했다. 여후는 한신을 불러들이려다가 혹시 한신이 응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상국 소하와 상의하여 사람을 시켜 고조가 있는 곳에서 온 것처럼 속여 말하게 했다.
“진희는 벌써 사형에 처했습니다. 여러 제후와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고 있습니다.”
소하가 다시 한신을 속여 말했다.
“병중이라 하더라도 부디 들어와서 축하의 뜻을 표하십시오.”
한신이 들어가자 여후는 무사를 시켜 한신을 포박하여 장락궁의 종실에서 목을 베도록 했다. 한신은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아녀자에게 속은 것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여후는 한신의 삼족을 멸하였다.
고조는 진희를 토벌하고 돌아와 한신이 죽은 것을 알고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가엾게 여기면서 물었다.
“한신이 죽을 때 무슨 말을 했는가?”
여후가 말했다.
“한신은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고조가 말했다.
“그는 제나라의 변사이다.”
이에 제나라에 조서를 내려 괴통을 체포하도록 했다. 괴통이 잡혀오자 고조가 물었다.
“네가 회음후에게 모반하도록 가르쳤는가?”
괴통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신이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 못난이가 신의 계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자멸해 버렸습니다. 만약 그가 신의 계책을 썼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그를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고조가 화를 내며 말했다.
“이놈을 삶아 죽여라.”
괴통이 말했다.
“삶겨 죽는 것은 억울합니다.”
고조가 말했다.
“네가 한신에게 모반을 가르쳤기 때문에 죽는 것인데 무엇이 억울하다는 말이냐?”
괴통이 말했다.
“진나라의 기강이 느슨해지자 산동 땅이 크게 어지러워지고, 진나라와 성(姓)이 다른 사람들이 아울러 일어나 영웅호걸들이 까마귀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진나라가 그 사슴을 잃자, 천하는 다 같이 이것을 좇았습니다. 이리하여 키가 크고 발이 빠른 자가 먼저 이것을 얻었습니다. 도척이 기르는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은 것은 요 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개는 본래 자기 주인이 아닌 사람을 보면 짖게 마련입니다. 당시 신은 한신만 알았을 뿐 폐하는 알지 못했습니다. 또 천하에는 칼날을 날카롭게 갈아서 폐하가 하신 일과 똑같이 하려는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능력이 모자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그들을 모두 삶아 죽이겠습니까?”
고제(高帝)가 말했다.
“풀어 주어라.”
그리고 괴통의 죄를 용서했다.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회음에 갔을 때 회음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말이 한신은 평민일 때에도 그 뜻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한다. 그 어머니가 죽었을 때 가난해서 장례도 치를 수 없었지만 [결국] 높고 넓은 땅에 무덤을 만들어 그 주위에 집이 1만호나 들어설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내가 그 어머니 무덤을 보니 정말로 그러했다.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워 겸양한 태도로 자기 공로를 뽐내지 않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한나라에 대한 공훈은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망(太公望) 등에 비할 수 있고 후세에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가 이미 안정된 뒤에 반역을 꾀했으니 온 집안이 멸망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사마천(김원중 역), 『사기』 「열전」- 회음후 열전 중에서]

한신이 영락한 자신의 신세를 토사구팽(兎死狗烹)에 비유했다는 대목이 재미있다. 인간사 어디서든, 사냥을 할 때보다 사냥이 끝났을 때 뒤탈이 많은 법이다. 결과적으로 유방이 이겼으니 위와 같은 서사가 창작된 것이지, 만약 한신이 이겼다면 또 어떤 스토리텔링이 가능했을까, 누가 때를 놓치는 우를 범했고, 누가 본디 도리를 모르는 자였을까, 문득 그런 쓸데없는 잡념이 든다. 혹자는 유방이 건달 출신이었다고 얕잡아 보지만, 세상을 얻는 ‘사냥’은 누구 한 사람의 자질과 힘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을 얻을 생각이 있는 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힘을 모아 사냥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해서 꼭 세상을 얻어야 할 것이다. 세상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사냥이 끝나면’ 있음직한 한신의 이야기도 아무런 재미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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